- 합작 고딕호러
- 2021년 10월 30일
- 20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31일

가을 들판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안개 낀 언덕을 마주한 채로, 그 언덕을 바라보고 있었다. 붉게 저물어가는 해가 그 들판과 여자를 비췄다. 짙은 주황색 빛 때문에, 창백한 피부가 진한 벽돌색처럼 보였다. 여자는 한참 동안 들판 위에서 검게 죽어버린 작물들과 함께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죽은 들판 위에서. 밀들은 바짝 말라 황금빛이 아닌, 거므스르한 빛을 띄었다. 올 해 여름은 가장 끔찍한 더위가 온 해였다. 농작물은 고사하고 사람이 마실 물도 없었다. 기근이었다. 더군다나 밀의 씨앗이 영글지 않는 병까지 온 들판에 퍼졌다. 이대로 두면 다음 해에도 어떤 수확도 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 들판을 내일 태우기로 결정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들판에 그 여자가 있었다. 진한 올리브색을 띄는 짧은 머리카락, 완전히 말라 핏줄이 도드라지는 손, 움푹 패여 흉하게 보일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아름다운 눈매. 여자는 젊었다. 오랫동안 굶었지만 아직 여자의 몸엔 살이 붙어있었다. 젊음만이 주는 부드러운 피부가 아직은 남아 있었다.
아나트는 들판에서 언덕을 보는 걸 멈추지 못했다. 푹푹 찌는 더위가 가시자, 저택은 온통 안개로 뒤덮혔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건 언덕이었고, 그 언덕위에 보란 듯이 지어진 게 바로 저 맥블랙가의 별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마을에 오지 않았다. 아주 가끔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싫어하는 가문의 일원들만 저 별장에 발을 들였다. 처음엔 가주였고, 그 다음엔 눈엣가시같은 이들. 멍청한 이들, 온갖 이들이 느린 텀으로 저 별장에 발을 들였다. 하지만 그 사람들 역시 이곳을 빠르게 떠났다. 고작해야 1주일 정도 머무르다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살하거나 다른 삶을 찾아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에서는 소문이 돌았다. 또 다른 맥블랙 가의 사람이 방문할거라고. 이번에는 가주라고 했다. 그것도 하나 뿐인 딸. 마을에 사는 모든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 여자를 욕했다. 그의 길고 부드러울 검은 머리카락, 맥블랙 가를 상징하는 자색 눈, 온갖 부와 시기를 몰고올 그 여자를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개중 몇은 확 저택에 불을 질러버리자고 했다. 끔찍한 건기가 올 때는, 제법 자주 집에 불이 옮겨 붙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올해가 마을 역사상 가장 심한 흉작이라고 하면,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순간의 쾌감은 곧 자신의 손자를 죽이고, 죽는 것보다 끔찍한 노예 생활을 물려주게 될 것이다. 그 별장을 다시 완성할때까지, 그 누구도 마을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말들에 사람들은 반박하지 않았다. 다시금 돌아와 맥블랙 가문의 여자를 욕했다.
아나트는 그 여자의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덕 위 안개에 쌓인 저택. 아무도 가꾸지 않아 추레해져버린 대저택. 아나트는 항상 그 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저 저택을 가꾸는 생각을했다. 비로 깎여나간 페인트칠을 더하고, 먼지 쌓여가는 접시들을 깨끗하게 닦아주고. 녹슬었을 램프에 양초를 켜주고 싶었다. 아나트는 그 저택을 방치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곳에 찾아오지 않는 주인이 원망스러웠다. 아나트는, 주인이 없어도 그 저택을 좋아했다.
들판이 점점 검게 물들었다. 곧 밤이 올 시간이었다. 짙은 보라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은 빨리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많은 허깨비와 마주칠거라고 경고하듯 빠르게 바뀌어 나갔다. 여자는 언덕에서 시선을 돌렸다. 기름에 적신 횃불을 들판 위에 얹고, 성냥갑을 꺼내들었다.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이 피어올랐다. 성냥이 타면서 독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성냥을 너무 오래들고 있던 바람에, 아나트의 손 끝이 가볍게 데인 것도 같았다. 빠르게 꺼지기 시작하는 그 불을 횃불 위로 던졌다. 불은 너무 쉽게 붙었다. 검게 죽은 들판을 화장하는 것 같았다. 불은 빠르게 안식을 주었다. 말라비틀어지고, 병든 그 육신을 밝게 태워주었다. 아나트의 얼굴에 노을과 엇비슷한 붉은 그림자가 졌다. 아나트는 들판에 불이 옮겨붙는 걸 확인하고는, 그 들판에서 나왔다. 오늘 새벽엔 불이 필요없을 것이다. 들판에 잠시 해가 내려왔으니, 어떤 별도 달도 맥을 가누지 못할 터였다. 들판에서 약간 멀어져, 아나트는 다시금 저택을 바라보았다. 끔찍하게 타고있는 들판 너머로 보이는 검은 저택을...
오후 늦게 마차가 들어왔다. 노을이 지려던 때였다. 험하게 운전했는지, 깔끔했었을 마차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온갖 곳에 진흙과 가축의 변이 엉긴 것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차는 고귀해보였다. 마부는 자신의 얼굴을 소매로 슥 닦아버리고, 급하게 일어나 마차의 문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가 마차에서 내렸다. 모두가 아는 맥블랙 가의 가주,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낯선 여자. 런던에서 자랐을 역겨운 귀족. 모두들 적개심과 경외심이 섞인 얼굴로 마차 안을 들여다 보려 애를 쓰고 있었다.
“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안내해. 오늘 저녁엔 별장으로 가서 쉬고 싶으니. ”
온 몸이 검은 벨벳으로 싸여있는 여자가 말했다. 챙이 넓은 모자가 아직은 따가운 햇빛에서 맥블랙 지주를 지켜주고 있었다. 여자는 불쾌한 듯 드레스 단을 살짝 손으로 집어 들었다. 끔찍한 냄새가 나는 진흙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은 것처럼. 모피로 된 가운은 부드러웠고, 여자는 마을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걸 누리고 산 것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피부, 손을 감싸고 있는 장갑과 장식. 향유를 발라 빗은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을 정돈해 올려 묶었을 단정한 머리. 마을에 살던 이들은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자고 했지만 그 감정은 마차의 끝이 보였을 때부터 이미 찾아들고 있었다.
맥블랙은 자신이 진행중인 사업을 이 마을로 확대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마을 사람들 중 대부분은 사업이 뭘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마을에 계속해서 누군가 드나들어야 한다는 말을 알아듣고 나서야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을 뿐이다. 맥블랙은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 평민들이 감히, 자신의 말에 반대한 걸 못 믿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조금 더 심도깊은 대화가 필요하다 싶었는지 마을 대표자의 집으로 안내하라고 대꾸했다. 사실상 반대는 듣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마을엔 맥블랙 남작의 하인들만 남았다. 마을사람들은 그 도시사람들에 진저리를 치며, 집과 교회로 도망쳤다. 아나트는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 숨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작의 역겨울 정도로 독한 향수냄새가 아직도 코 끝을 맴돌고 있었다.
맥블랙 남작은 마을의 가장 큰 결정권을 가진 이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그녀를 놀리듯 대화는 지지부진하고, 고리타분했다. 그들은 새로운 사업이 시작되는 걸 아니꼽게 여겼고, 가문싸움에서 밀린 도로테아가 내보일 수 있는 패는 한계가 있었다. 도로테아는 짜증을 달래려 시가 파이프를 꺼냈다. 흐린 날씨 사이로 짙은 연기가 흩날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대로 관리되어 있지 않을 별장을 생각하고는, 분에 이기지 못해 파이프를 꺼버렸다. 입맛이 썼다. 사람을 여럿 데려왔으니, 하루정도만 참으면 쓸만한 곳으로 변할거라는 기대를 가진 채 다시금 마차를 세워둔 곳으로 이동했다.
마차를 세워둔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짙은 탄내가 도로테아를 괴롭게 했다. 기침이 멎질 않았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물을 들고 마차의 불을 끄려는 사람들. 그리고 우는 사람들. 고기가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와 동시에, 도로테아는 눈 앞에 보인 거대한 불이 자신의 마차를 뒤덮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입을 벌렸지만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마차의 겉은 단단한 쇠지랫대로 잠겨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하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도로테아는 그대로 헛구역질을 했다.
시간이 지나, 마차의 불길이 잦아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남작을 바라보았다. 외부인인 도로테아를 바라보는 그 폭력적인 눈빛에, 도로테아는 아무 주저 없이 근처에 있던 물건을 내던졌다. 건방진 것들. 끔찍한 상황에 나오는 말은 그 뿐 이었다. 어떤 애도의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려고 하는 이 순간에서. 살인이나 피해보다도, 도로테아는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화를 멈출 수 없었다.
누가 이랬냐는 말은 채 입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모두가 검게 죽은 눈을 하고 도로테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미동도 없는 눈동자들. 사람과 마차가 불에 타도 움직이지 않는 죽은 자들의 눈빛이 도로테아를 감쌌다. 끔찍한 소름이 팔 끝에서부터 올라와, 도로테아는 서 있는 것에도 안간힘을 써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의 경찰과 지도자가 도착하고, 거기 서있던 모두가 용의자 혐의를 받고 자택에서 격리처리하는 것으로 일단락났다. 도로테아는 분을 이기지 못했다.
“ 농사지을 땅이 있음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
“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싫어하니까요 남작님. ”
한 소녀가 나서서 도로테아의 말에 화답했다. 진한 올리브 빛 머리카락. 짧게 잘린 머리카락은 그녀가 얼마나 궁핍한 상황인지 보여줬다. 끝나지 않는 가난에 자신의 머리카락이라도 팔아서 넘겼나보지. 짧은 시간동안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도로테아는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생기 넘치는 눈과 허드렛일로 굳어진 손. 햇빛과 바람에 거칠어졌을 지언정 창백한 흰 피부. 그 여자는 도로테아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여자아이를 보면서 처음으로 마음이 풀어졌다. 벙어리마냥 가만히 서 있는 저 멍청한 놈들과 여기에 더 남아있기 싫었다. 마침 자신의 시중을 들 여자아이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입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 너. 따라 와. 내 시중을 들 아이가 죽어서 대체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
아나트는 도로테아를 따라 저택으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도로테아보다 아나트에 대한 적개심이 커보였다. 가족이 없나보지. 도로테아는 그 적대적인 시선을 짧게 일축해서 판단했다. 폐쇄적인 마을에서 모두가 싫어하는 여자아이면, 자신의 곁에 둘 만했다. 도로테아는 이 일로 마을의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니. 끔찍하고 멍청한 놈들. 차라리 도시놈들처럼 살기 위해 제게 달라붙는 여자애가 나았다. 아나트는 마을에 하나있는 마차를 빌려 마부와 함께 도로테아의 별장으로 길을 나섰다. 다행히도 저택에 짐을 내려뒀기에, 당분간 생활은 어렵지 않을 듯 싶었다. 도로테아는 울분을 참지 못해 계속해서 파이프를 태웠다. 재가 마차에 떨어지며 가루를 날렸다. 아나트는 연신 기침을 했지만, 도로테아는 한 두 번 흘긋이고 말 뿐이었다.
저택은 거대했다. 안개가 걷히지 않아 언덕 아래와는 날씨가 완전히 달랐다. 축축하고 무거운 습기가 도로테아의 드레스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피로감이 온 몸을 감싸 안았다. 따듯한 목욕과 제대로 된 끼니가 절실해진 도로테아는, 바쁘게 방을 찾았다. 저택은 생각했던 것 보다는 관리되어 있었다. 적어도 죽은 벌레를 발견하거나, 계단 가득히 쳐진 거미줄을 발견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누군가 일주일에 한번. 혹은 한 달에 한번은 들려 관리를 해준 것처럼 저택의 상태는 완벽했다.
오래 전에 지어져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2층 중앙에 침실이 보였다. 햇빛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방이었으나, 물안개로 인해 창 밖은 온통 안개로 가득했다. 도로테아는 커튼을 쳐버리고는, 짐을 풀었다. 잠옷을 찾아 꺼내고는, 나머지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나트에게 시켰다. 아나트를 데려온 건 충동적인 일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고아 여자애를 자신의 시종으로 데려오는 일은. 도로테아는 아나트를 바라보았다. 옅은 자색 눈동자가 저택에 들어오면서부터 자수정처럼 반짝였다. 고작 평민주제에 자신과 비슷한 눈색을 가진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곁에 둘 마음은 들었다.
“ 너.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나? ”
“ 계속해서 이 곳에서 살았어요. 부모님은 이제 안계시지만요. ”
“ 형제나 가족은? ”
“ 없어요. 모두 마을을 떠나거나 죽어서... ”
“ 그래서 그때 마을 사람들을 두고 날 따라온건가? ”
어떤 배려도 없는 질문이 들어왔다. 아나트는 막힘 없이 대답했다. 대답과 동시에, 도로테아는 이 여자애가 완전히 고립되어 있어서 편하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생긴다면 추방시켜버리면 그만일 여자애였다. 마을에서도 하등 쓸모가 없는. 곧 죽거나 멍청한 농부의 아내가 될. 머리에 생각이 있다면 가끔 들리는 역겨운 장사치들의 첩이 될지도 몰랐다. 차라리 이 마을이 아닌 곳에 있는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가정사였다.
“ 그냥... 알려 드리고 싶었어요. 이 마을에는 맥블랙 가문 사람들이 들리지 않은지 오래 되었거든요. ”
“ 건방진 얘기는 작작해. 이미 알고 있으니. 한번만 더 무식한 얘기를 한다면, 뺨을 맞을 줄 알아. ”
도로테아의 말에 아나트는 입을 다물었다. 도로테아는 그 시골에서 자란 멍청한 여자애가 겁을 먹은 줄 알았지만, 이내 그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해야했다. 아나트는 옅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꿈 꾸세요. 짧은 인사말을 남기고 아나트는 도로테아의 방에서 떠났다. 옅은 향초냄새와 그 여자 특유의 향취가 남아 머리가 아팠다. 도로테아는 새로 입은 잠옷의 감촉과 원치 않았던 이불의 폭신함에 연신 뒤척거리며 잠을 설쳤다. 창 밖으로는 다시금 안개가 차오르고 있었다.
*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지날동안, 아나트의 시중은 완벽했다. 그녀는 한번도 시종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눈치가 빠르고, 기민했다. 도로테아가 시험삼아 부리는 폭력이나 폭언에도 입꼬리를 한번 올려 웃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건방져 보이지 않았다. 도로테아가 딱 원했던 것들이었다. 고요한 것. 주제를 아는 것. 자신이 원하는 걸 지시하기 전에 맞춰두는 것. 믿고 싶지 않았지만 아나트가 시중 드는 삶이, 하녀 3명에게 일일이 지시하던 여행길보다 편안했다. 아나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목욕물을 맞춰두었고, 근처의 들꽃과 향유를 섞어 목욕물에 타 준비했다. 자신이 주로 있는 공간들은 눈이 아플 정도로 깔끔하게 청소해두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항상 도로테아의 근처에 맴돌았다.
도로테아는 아나트의 시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나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외부인인 자신을 따라와 헌신적으로 일했다. 도로테아는 아나트의 손을 바라봤다. 일을 하는 사람의 손이다. 단순히 굶어죽지 않기 위해 빌빌대는 거렁뱅이의 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하던 일은 팽개치고, 왜 자신에게 왔을까. 지지부진한 범인을 색출하는 일과 함께, 도로테아는 이 보잘 것 없는 여자에게 궁금증을 품었다. 아나트는 도로테아가 자신을 종종 뚫어져라 보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남작이 자신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도록.
“ 마을에 정리할 것은 없나? ”
도로테아의 질문에 아나트는 한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당혹스럽다기 보단, 이미 알고 있는 얘기를 다시 하는 것 같은 반응에 도로테아는 코웃음을 쳤다. 부드러운 살결과 자신이 씻고 남은 물로 목욕하며 부드러워진 머리카락. 옅게 빛나는 자색눈과 싱그러운 몸. 하녀복을 입혀뒀을 뿐이지만, 젊은 아나트는 점차 생기를 띄었다. 누가봐도 이 저택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사람처럼. 도로테아는 그걸 눈치챘기에 아나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 글쎄요... 남작님이 머무는 시간정도는 여유가 있어요. ”
“ 만약 내가 널 데려간다고 해도? ”
도시에서의 성공. 도로테아는 미끼를 던졌다. 자신의 마음에 들면 저택에서도 하녀일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돌려서 한 것과 다름 없었다. 도로테아는 하녀들이 얻는 수당이, 연고도 없는 불쌍한 시골 처녀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값진 일임을 알고 있었다. 하녀일을 하다가 적당히 결혼을 하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도로테아는 저 불쌍한 여자애를 구하기 위한 제안을 건냈을 뿐이다. 예상대로, 아나트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다 이윽고 떨림이 멈췄다. 도로테아는 정말로 그녀를 데려가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하루 정도 휴가를 주시면 들릴 곳은 있을 것 같네요. ”
“ 모레 마을에 들릴 참이니 그날 다녀와. 늦어도 저녁 종이 치기 전 까지는 별장으로 돌아와야 할 거야. ”
어디에 들려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도로테아가 시골에서 사는 이의 개인사를 알 필요는 없었다. 모두 부가적인 것들이었고, 도로테아가 알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아나트는 두어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로테아는 그 순간 저 여자애를 벗겨두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저 태연한 표정이 수치심으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몸 밖에 없는 천한 것을 내세워 자신 아래에 무릎 꿇리려는 마음에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아나트를 노려보았다. 미묘한 갈증에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쓸어냈다. 먼지 하나 없는 선반이 마음에 들지 않아, 화풀이를 하듯 손을 거칠게 털어냈다. 저 예쁘고 부드러운 여인을 자신이 잘 가꿔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고 싶었다. 그 어떤 보석보다 자신을 빛내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 코웃음을 쳤다. 할 일이 많았다. 마을 사람들을 심문한 결과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살인범을 잡으려면 바쁜 하루가 되어야 할 터였다. 도로테아는 아나트의 수수한 하녀복을 바라보다, 자신의 옷장에서 옷을 한 벌 꺼내주기로 마음 먹고 방을 나섰다.
일은 지지부진 했다. 마을 사람들 주변에선 그 누구도 마차 주변을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두가 서로를 본 알리바이가 있었다. 새로 나온 단서라고는, 마차에 들이 부었던 기름. 그리고 안에 있는 사람을 꺼내지 못하도록 잠궈 둔 쇠꼬챙이가 끝이었다. 기름은 썩은 들판을 태우기 위해 준비해둔 것이라, 처음엔 우발적인 사고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쇠꼬챙이의 녹은 끝이 발견된 이후로부턴 계속해서 같은 점만 맴돌았다. 마을 사람들 역시 마을 안에 방화범이 있다곤 믿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날 선 기운이 마을에 가득했다. 이장은 경찰을 불렀으니, 3일 안으로는 도착할거라며 도로테아의 눈치를 봤다. 이 마을의 모든것에 신경질이 났다. 들고 있는 찻잔을 모조리 깨버리고 싶을 정도로. 도로테아는 손에 있는 걸 내던지고 싶다는 생각과 동시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멍청한 하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나트는 여전히 충실했다. 자신의 시중을 들었으며, 여전히 자신의 편의에 맞춰 움직였다. 달라진게 있다면, 처음보다 더 생기가 돌았다. 그 촌것은 마치 첫사랑에 빠진 어린 여자애처럼 굴었다. 도로테아는 그 온화한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그 텅 빈 표정을 보고 싶다는 가학심에 가끔 아나트를 불러 세워서 아무 이유 없이 매질을 하기도 했다. 가볍게 종아리를 때리는 일에 그쳤지만, 왜 맞아야 하는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아나트는 아무렇지 않게 벌을 받았다. 그리고 꼭 도로테아와 눈을 마주했다. 일렁이는 눈동자가 자신을 볼 때면 도로테아는 그 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 곳은 그녀의 별장이고, 저택이었지만, 자신이 떠난 후에도 아나트는 이 저택에서 머물 거라는 이유없는 불안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도로테아는 그 구분이 감히 멍청한 여자애를 별장으로 들인 불쾌감 때문인지, 자신이 이곳을 떠나도 아나트가 남을거라는 사실 때문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 마을에 갈거야. 그러니 너도 그 칙칙한 하녀복은 내다 버려. ”
버릴 옷 중 한 벌을 줄테니. 그날 밤. 자신의 방에 들어온 아나트를 불러세워 자신의 앞에 세웠다. 들고 다니던 파이프로 밋밋한 하녀복의 가슴팍과 어깻죽지를 긁었다. 옷장을 열어 낡은 옷을 전해주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문화였다. 하지만 적어도 아나트처럼 외부인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하녀가 직접 옷을 물려받는 일은 드물었다. 믿을 수 없던 건지, 아나트는 그저 가만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수치심이라도 느끼나 보지. 도로테아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파이프를 다시금 입에 물었다. 그리고 아나트가 스스로 옷을 벗을 때까지 그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천들이 떨어졌다. 단순한 구조로 되어있어 아무리 옷을 벗는 걸 늦춰보려해도, 더 벗을 것도 없었다. 몇 개 되지 않는 단촐한 단추를 끄르고, 치마를 벗은 다음 안에 갖춰 입었던 속옷의 매무새를 연신 다듬었다. 아나트의 손 끝이 잘게 떨리는 걸 보고서야, 도로테아는 기이한 만족감을 느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옷 사이로 가려져 흰 피부였다. 겉은 거칠었지만, 흰 피부는 촛불 아래 은은하게 빛났다. 매끄럽게 이어진 허리와 골반. 작고 부드럽기보단, 벌어진 어깨와 마른 쇄골. 풍만한 가슴이 도로테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도로테아는 아나트의 몸 위를 파이프 끝으로 덧그렸다. 수치심을 주기 위해 한 일이었으나, 원치 않았던 고양감이 도로테아의 척추 끝부터 머리끝까지 단박에 치솟았다. 귀 끝에 열이 오르는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아나트가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 제게 원하시는 게 따로 있으신가요? ”
“ 옷의 치수를 재야 했을 뿐이야. ”
도로테아는 바보같은 변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나트는 그런 그를 놀리듯,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뺨에 뺨을 가져다 대었다. 거친 살결이 닿았다 떨어지며 따끔한 느낌을 주었다. 마주 본 눈동자에 주홍빛 촛불이 반사되어 일렁거렸다. 아나트는 길쭉한 손 끝으로 도로테아의 손 끝을 더듬다, 그녀의 손을 들어올려 자신에게로 가져다 대었다. 치수를 재셨다면, 이제 제게 선물을 주실건가요? 건방진 말과 동시에 잔잔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창 밖으로는 조금씩 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토독거리는 소리와 찬기가 몸에 서려 불쾌했다. 도로테아는 그 불쾌함을 핑계 삼아 아나트의 몸에 자신의 몸을 가까이 붙였다.
“ 건방지게 굴지 마. 그냥... 네 주제를 알려주려는 거지. ”
“ 전 누구보다 제 주제를 잘 알고있는 걸요 남작님. ”
전 당신께 도움이 된다면 기쁠거에요. 가증스러운 말소리와 함께 옅은 숨이 귓가에 닿았다. 도로테아는 지금이라도 저 주제를 모르는 것의 뺨을 내칠까 고민했다. 평소라면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갔을 손끝이 잘게 떨렸다. 아나트는 그 손을 붙잡고 도로테아의 두 볼과 목에 입술을 묻었다. 찬 바람에 식혀졌던 피부에 온기가 간지럽게 퍼졌다. 아나트는 대담했다. 도로테아의 기분을 살피며 점차 노골적으로 움직였다. 처음엔 뺨, 그다음은 목, 쇄골위를 덧그리던 손가락은 점차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허리와 골반 위쪽을 간지럽혔다. 도로테아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얼마지나지 않아 들뜬 숨소리와 열기가 병이 돌 듯 방 안에 가득해졌다. 간지러운 감각에 발 끝이 오무라들었다. 죄악감은 들지 않았다. 도로테아는 그저 아름다운 자신의 물건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느꼈으니까. 어느 한구석에서 아나트의 집요한 눈빛과 소름끼칠 정도로 자신만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불안이 있었으나, 도로테아는 쾌감 앞에 판단력을 잃어버렸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에겐 보상이 필요했다. 어느 순간부터 아나트가 제게 주는 감각을 보상이라 여기며, 도로테아는 불필요한 걱정을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헐떡이는 소리와 함께 촛불이 일렁거렸다. 비가 오는 새벽동안 촛불은 계속해서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그 날 이후로 종종 아나트를 자신의 침실로 불렀다. 아나트는 치욕스러운 표정을 짓지도, 그렇다고 순종적인 태도로 굴지도 않았지만 도로테아는 아나트를 부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그를 총애라도 한다고 착각하는 걸까. 속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촌 것을 비웃으면서도 도로테아는 아나트를 불렀다. 마을에서 벗어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아쉬워 하는 사람처럼. 이 곳을 떠나면 완전히 아나트를 잊어버리려는 것처럼, 아나트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끔찍한 마을에서의 삶도 단순한 자극에 매몰되어 지내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수도의 역겨운 소리들보단 이게 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목걸이를 하나 찾았어요. ”
도로테아는 그 날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아나트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건 날은 그 날이 유일했다. 평소였으면 여느때와 같은 웃음을 짓고 할 일을 하러갔을 텐데, 그날은 방 안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손에는 금박과 가문의 인장으로 장식된 상자가 하나 있었다. 촘촘히 붙어있는 장식들이 상자 그 자체도 제법 괜찮은 장식품임을 알아보게 했다. 상자 안에는 목걸이가 있었다. 아나트는 붉은 루비와 진주가 얽힌 목걸이를 하나 가져왔다. 안쓰는 곳에서 발견했어요. 아셔야 할 것 같아서... 말 끝을 흐렸다. 매질을 당할까봐 걱정한 거겠지. 도로테아는 회초리 대신 아나트에게 다가가 목걸이를 낚아챘다. 사치스러운 루비를 쓴 목걸이는 생전 조모가 사용하던 목걸이었다. 처음으로 이 별장에 유폐된 늙은이. 미치광이라는 말과 함께, 아이들이 다 자라자 이 별장에 버려졌다고 했다. 도로테아는 잊고 있던 기억을 목걸이와 함께 꺼내들었다. 어렸을 적에 이 별장에 왔던 기억을. 어머니는 별장 한가운데 걸려있던 조모의 초상화를 치워버렸다. 2층 구석진 곳의 서재로. 서재라고는 하나, 사실상 창고와도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 건방지구나. 네 행동은 지금 내 앞에서 도둑질을 했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 없어. ”
“ ... 제 무례를 용서하세요 남작님. ”
하지만 남작님께서 이 목걸이를 차신 걸 꼭 보고 싶었어요. 아나트는 조심스레 다가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양해를 구하겠다는 그 몸짓에, 도로테아는 잠시 주저하다 자신의 목을 내어주었다. 차가운 보석의 감촉이 목에 닿을 때, 얕은 전율마저 느껴졌다. 아나트를 목걸이로 차고 싶다는 열망이 이 루비 목걸이로 나타난 것만 같았다. 목 뒤쪽에 짧은 입맞춤이 느껴졌다. 끔찍한 기분에 넌더리를 치고싶은 걸 참은 채, 아나트의 손목을 잡아챘다. 손 안에 쥔 손목을 꺾어버릴까 고민했지만, 미동도 없는 아나트를 보고는 천천히 손을 놓았다.
“ 건방지게 굴지마. 이 목걸이는 우리 조모의 것이니까. ”
“ 그분이 맥블랙 가의 안주인이셨던 분인가요? ”
쓸데 없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기대감 어린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다 사라졌다. 아나트는 도로테아를 바라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붉은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수수한 실내복 위에 얹어진 목걸이었으나, 도로테아와 더할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마치 초상화에 있던 맥블랙 부인이 살아난 것처럼 보였다. 아름다우시네요 남작님. 당신을 위한 목걸이 같아요. 멍청한 소리를 조곤거리며 도로테아의 머리카락에 손을 얹었다. 기분이 풀어진 도로테아는 아나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빗어 정리했고, 평소보다 조금 더 화려하게 머리를 틀어올려 고정했다. 꼭 파티에라도 가는 사람처럼.
“ 네가 내 시간을 다 잡아먹는구나.”
“ 오늘은 마을로 내려가진 못하실 거에요. 폭풍이 올 거거든요. 집에서 쉬시는 게 어떠세요?”
초조한 감정이 말 끝에 묻어났다. 도로테아는 상황을 가늠하듯 창밖을 바라보는 척, 아나트의 표정을 살피다 그녀가 마른침을 삼킬 때 쯤 가볍게 좋아. 라고 대답한다. 여자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도로테아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던 드레스를 가져온다. 검은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를 입히는 손길이 간지러워, 도로테아는 계속 어깨를 떨었다. 항상 입어오던 옷이 쓸리는 감촉에도 짧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모든 옷을 다 입힌 아나트는, 넋이 나간 것처럼 도로테아를 바라보고 있다. 아나트의 눈이 검붉은 드레스를 빠르게 지나고, 루비와 진주가 아름답게 엮여진 목걸이, 마지막으로 도로테아의 가라앉은 자색눈과 마주한다.
“ 정말 아름다우세요 남작님. ”
지금 당신의 모습을 그려서 저택에 걸어두고 싶어요. 모두가 당신을 볼 수 있게... 속삭이는 말과 함께 귓가에 애정을 담은 입맞춤이 전해진다. 도로테아는 또 다시 아나트를 내칠지, 혹은 그녀에게 몸을 맡길지를 고민한다. 추운 날의 떨림이 온 몸으로 전해진다. 도로테아는 그 선득하지만 기분좋은 감정에 빠져 아나트를 허락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드러운 아나트의 입술이 도로테아를 경배하듯, 모든 피부 위에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 귓가, 손등. 어깨, 두 뺨과 머리카락. 이마를 지나... 마지막으로 입술 앞에 멈춘다. 아나트는 여전히 도로테아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다. 자색 눈동자가 오로지 도로테아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 집요한 시선. 도로테아는 공포감과 함께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어느새 방 안은 거친 숨소리로 가득하다. 도로테아는 이 숨이 아나트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 영원히 제 곁에 계셔주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
영원히. 도로테아는 그날 밤 이후로도 계속해서 아나트의 말소리를 들었다. 환청이라기엔 온건했고, 단순히 기억을 더듬는 거라기엔 소름끼치도록 제어할 수 없었다. 도로테아는 매일 밤, 아나트가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과 함께.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어달라는 말을 할때의 표정을 떠올리며 악몽을 꿨다. 아나트는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 뭣모르는 촌 것이 자신을 동경하는 거라 생각했거늘. 그 애는 전혀 자신에게 쩔쩔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눈은 사냥을 목전에 앞둔 굶주린 이리를 연상시켰다. 볼품없는 가죽과 고르지 않은 털. 먹잇감과 거리를 유지하며 배회하는 죽어가는 이리. 하지만 그 눈은 여전히 사냥감을 쫓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아나트를 생각할때마다 악몽을 꿨다. 아나트는 꿈에 나와 도로테아에게 입을 맞추고, 부드러운 말로 자신을 달랬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손 안에서 도로테아는 무덤에 묻혔다. 영원히 이 별장에 갇혀 시체를 가지고 노는 아나트의 모습을 보았다. 작은 시체는 언제나 도로테아 자신의 모습이었다. 끔찍한 꿈을 꾸고 비명을 지르면, 영문을 모르겠다는 아나트의 얼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로 도로테아는 아나트의 시중과 악몽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모든 걸 맞춘 그 헌신적임이. 점차 더 심해지는 폭언에도 아무렇지 않게 웃어보이는 그 얼굴이. 모든게 경멸스러웠다. 도로테아는 그 경멸이 공포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기 위해 끊었던 시가를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아나트를 자신의 방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나트는 도로테아의 의사도 묻지 않고는 꿈에 나타나 도로테아의 모든 걸 휘저어 뒀다. 시가에 점점 아편의 비율이 높아져만 갔다. 동시에 도로테아는 새벽 중 아나트의 이름을 부르는 날이 더 잦아졌다.
도로테아는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떠날 결심을 했다. 저 촌 것을 버리고 가리라는 건 이미 생각했던 일 중 하나였다. 마음에 걸렸던 건, 단지 살인사건 하나 수습못하고 도망친 머저리로 보일까 마을에서 머물렀을 뿐이다. 도로테아는 스스로에게 명분을 만들어주며 오랜만에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목걸이를 보며 적대적인 눈을 했다. 자신들은 한번도 보지 못했을 보석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엔 끔찍한 분노만이 서려있었다. 첫날보다 더 강렬해진 적대감에 도로테아는 불쾌감을 느끼며 마을 안을 헤매야 했다. 마침내 마을 이장이 있는 곳으로 왔을 때. 도로테아는 그토록이나 기다렸던 범인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수확을 앞둔 마을은 밭이 썩어버린 탓에 밭을 완전히 태우기로 결심했다. 다음해라도 농사를 망치지 않으려면, 태운 재를 거름삼아 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넓은 들판을 태우는 일은 성인 남성이 해도 버거운 일이라, 순번을 정해가며 돌아가며 들판을 태웠다. 그중 아나트는 그 순번에 들지 않았다. 여자가 굳이 자원해서 들판을 태울 일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도로테아가 마을에 온다는 소식이 들린 이후, 아나트가 마지막으로 들판을 태웠다. 이 협소한 마을에서 기름을 구하는 일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기껏해봐야 횃불에 쓸 기름정도만 남을 뿐이었으니까. 마차를 태울 기름을 구해서 빼돌리려면, 돈이 아주 많거나 들판을 태울 때 기름을 따로 빼놓아야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은 아나트가 범인이라고 지목했다.
그리고 경관이 아나트를 붙잡기 위해 자신의 별장으로 향했다는 말을 끝으로, 도로테아는 마차를 불러 자신의 별장으로 향했다.
*
별장이 보였다. 저택은 여전히 거대했고, 호수가 만들어내는 희뿌연 안개 사이에 감싸져 있었다. 줄기가 마른 나무들이 겹쳐지며 그 저택을 가리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그 물안개 사이에서 조금씩 짙어지는 탄내를 맡았다. 익숙했다. 마차로 돌아갈 때 나던 냄새. 나무가 불에 타고, 어떤 기름진 것이 불타는...
작은 불이 넘실대고 있었다. 주홍빛 불이 여자의 피부를 덥혀 자신의 색으로 물들여가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는, 들판에서 저택을 바라보던 시선과 같았다. 앞에 시체를 두고도 여자는 어떤 떨림도 가지지 않았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처럼. 고요하게 불 앞에서 자신의 몸을 녹였다. 도로테아는 문득 아나트가 입고 있는 옷이 자신이 선물해준 옷임을 깨닫는다. 나방의 점들처럼, 베이지색 옷에는 강렬한 무늬가 만들어져 있었다. 선물해준 옷 모든 곳에 검댕과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꼭 나방처럼 보이기도 했다.
“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는거야. 처음부터 너같은 것을 받아주는 게 아니었어... ”
“ 잘 생각해보세요 남작님. 저 사람이 절 잡아가면. 당신은 어떻게 되셨겠어요. ”
제게 실망하고 이 저택을 떠나셨겠죠. 여자는 평온해보였다. 떨림 없는 목소리에서는 도로테아를 향한 엷은 애정이 배어져 나왔다. 당신께서는 이 곳에 있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 모습은 너무나 고요하고 여유로워서, 도로테아는 자신이 보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의 차이를 인지하려 많은 시간을 써야 했다. 가빠지는 숨을 막을 수가 없었다. 구역질 나는 냄새와 더불어 눈에 보이는 모든게 타고 있었다. 흙 주변에 일부러 놓은 듯한 마른풀이 눈이 아플 정도로 매캐한 냄새를 풍겼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뿌연 연기 사이에서도 아나트는 도로테아를 올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로테아는 헛구역질을 하다, 욕설을 내뱉고, 이내 정신을 잃었다. 긴 침묵만이 저택에 남아 떠돌았다.
*
명확하지 않은 의식 너머로 빗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기가 버거웠다. 차라리 이 잠이 영원하길 바라며 도로테아는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눈을 뜬 곳은 자신의 침대였다. 어슴프레한 푸른빛으로 물든 방은, 지금이 몇시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급하게 방 안을 살펴보면, 모든게 평소와 같았다. 그리고 위화감이 느껴졌다. 몸이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웠던 탓이다. 도로테아는 현기증을 느끼며 다시금 벽에 등을 기댔다. 벽으로부터 찬 기운이 퍼져 올라왔다. 모든게 현실 같았으나, 도로테아는 지금 이 순간도 자신의 악몽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곧 아나트가 나타나 자신에게 입을 맞추고, 제게도 불을 지필 것 같다는 그 끔찍한 상상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도로테아는 자세를 웅크리고, 바깥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의 악몽이 제게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걸 애써 막으려 했다. 아직 채 진정이 되지 않은 그 순간에, 두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 꽤 오랜 시간이 지났어요 남작님. ”
가장 원하지 않던 목소리와 동시에, 숲의 물비린내 사이에서도 유독튀는 향취가 먼저 풍겨왔다. 옅은 자색 눈동자가 도로테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가 담긴 접시를 들고, 하녀복을 입고 있는 아나트의 모습은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은 것만 같았다. 하루를 내 주무셔서, 소화가 편한 것으로 들고왔어요. 남작님께서 좋아하셨던 걸로 특별히 골랐죠. 제가. 자부심 서린 목소리를 뒤로 양파스프와 밀이 섞이지 않은 빵, 이곳에 얼마 남지 않은 과일 잼이 차려져 있었다. 도로테아는 그 접시와 아나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왼손으로 접시를 엎어버렸다. 아나트의 얼굴에 저 접시들이 맞기를. 그 접시 조각으로 저 뻔뻔한 시선이 제게 와닿지 않음을 기도하며 도로테아는 소리를 질렀다.
“ 역겨운 자식. 살인자 주제에 뻔뻔스럽게 나를 따라 이 집으로 기어 들어오다니. ”
“ 제게, 그리고 남작님께 꼭 필요한 일이었어요. ”
당신께 그리 중요하던 이들도 아니었잖아요. 아나트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단아한 태도로 속을 긁는 말을 내뱉었다. 도로테아는 손을 들어올려 뺨을 때리려고 했으나, 이내 침대에 결박된 오른쪽 손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칠어진 숨이 급하게 잇새로 빠져나갔다. 아나트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하는 도로테아를 보며, 아나트는 깨진 유리로 가득한 바닥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트는 입을 열었다. 도로테아는 그 입술을 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얇은 이불은 아나트의 말까지 막아주진 못했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리게 말이 흘러들어왔다.
이 마을에 연고도 없는 절 데려온 건 도로테아, 당신이에요. 뭣 모르는 여자애를 데려다 쓸 때는 마음에 드셨겠죠. 하지만 제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셨나요 남작님. 전 당신이 절 걸레짝처럼 버릴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적어도 당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됐어요. 잠시 한숨소리가 섞여들었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년. 도로테아가 아나트의 뺨에 침을 뱉었다. 아나트는 손수건으로 뺨을 닦아내곤, 도로테아의 앞에서 웃어보였다.
“ 남작님이 절 선택하신 걸 후회하지 않도록 도와드릴게요. ”
아나트의 손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도로테아가 내버리듯 던져버렸던 목걸이였다. 다시는 이 별장으로 돌아오기 싫다는 집념이 담긴 일이기도 했다. 아나트는 도로테아의 감정을 짓밟듯, 그 목걸이를 다시 제게로 가져왔다. 건방진 소리 하지마. 쇳소리가 목구멍을 긁으며 빠져나왔다. 꼭 겁먹은 사람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도로테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목 뒤쪽으로 조금씩 선뜩한 감각이 지나갔다.
저는 당신의 조모가 부른 마지막 시종이었어요. 그리고 당신께 이 별장을 물려줘야 하는 이유도 있죠. 도로테아는 모두 모르는 일이었다. 말년을 미치광이로 산 조모가 한 행동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건지, 도로테아는 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고아인 자신을 거둬준 조모에게 감사를 느껴서? 아니다. 이 정신나간 년은...
“ 그분을 잃고 이 저택은 너무 외로워졌어요. 그분은 이 집에 가장 어울리는 분이셨는데... ”
먹이감을 보는 것처럼 빛나는 눈이 형형하다. 도로테아는, 아나트가 이 별장 그 자체같다고 느꼈다. 자신을 이 집에 메어 미치광이로 만들어,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 이후로 이 곳을 들린 사람들은 너무 빨리 저택을 떠나버렸어요. 혹은 죽거나. 거의 대부분 죽었죠. 맥블랙 가문 역시 그런 걸 원했으니까. 도로테아는 아나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닥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이거 풀어. 도로테아는 그냥 이 방을 빠져나가, 아무 마차나 잡아타고 런던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어떤 망신을 당하던 이 곳에서 벗어나는게 우선이었다. 거친 천에 쓸린 오른쪽 손목이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 그러니 그분께서 가장 원하셨던 일을 도와드리려는 거에요. 당신이 이 맥블랙 가를 이으셔야죠. ”
그분과 같은 방식으로요. 모든 건 이 저택에서 시작했어요. 당신의 본가도, 어쩌면 이곳이 먼저일지도 몰라요. 아나트는 도로테아의 손목을 쓸어내고는, 검은색 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들췄다. 가까이 다가가 목에 입을 맞추고, 잠깐 긴장이 풀렸을 때 목걸이를 다시금 도로테아의 목에 채워주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도로테아는 더 이상 이 루비들이 아름다워보이지 않았다. 저주받은 보석이나 다름 없었다. 낡은 천이 풀려났고, 도로테아는 가까이 다가온 아나트를 몸으로 밀쳐 방에서 벗어났다. 소란과 함께 손목에서 옅은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도로테아는 숨이 막힐정도로 뛰었으나, 뒤에서 인기척이 가까이 다가왔다. 둥글게 지어진 계단과 삐걱거리는 바닥은, 도로테아가 중심을 잡기에 최악이었다. 도로테아는 이 계단에서 자신이 떨어지는 상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집이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것 같았다. 저 끔찍한 년이 자신을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것 같았다. 늪에 빠진 것처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모든게 도로테아를 압박해왔다. 거실을 앞에 두고 그 불안은 현실로 나타났다. 계단에 길게 깔려있던 러그가 미끄러지며, 도로테아는 미끄러져 러그와 함께 그곳을 굴렀다. 온 몸을 두들기는 고통과 함께 시야가 반전되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아나트가 보였다.
“ 손목에서 피가 나요 남작님. ”
조심하셨어야죠. 러그 위에서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도로테아에게 다가온다. 아나트의 눈은 열망으로 가득 차있다. 처음 도로테아를 발견한 날처럼. 그녀의 시중을 들었던 날처럼, 그녀가 죽음을 목격하는 걸 보던 그 날처럼. 급하게 뛰어 내려오느라 매음새가 엉망이된 옷이 흘러내린다. 아나트는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도로테아의 위를 짓누른다. 부드럽고 창백한 손이 도로테아의 목을 가볍게 그러쥔다. 도로테아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아 쳐내려고 하지만, 통증이 가시지 않은 몸은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도로테아는 계속에서 몸을 움직이지만, 그건 자신의 숨통을 더 조이는 일이 될 뿐이다. 날카로운 보석들이 목에 박히듯 눌러져, 따끔거리는 통증마저 이어진다. 아나트의 시선은 여전히 그 목걸이게 가닿아 있다. 도로테아는 난리통에 떨어진 제 옆에 떨어진 칼을 본다. 그리곤,

“ 난 네 주인이 아니야. 덜떨어진 것. ”
도로테아는 아나트의 손을 잡아, 한껏 내쳤다. 반동으로 인해 아나트의 손이 목에서 떨어져 나가고, 목걸이의 보석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흔들거리던 양초와 칼이 도로테아의 근처로 떨어지고, 도로테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을 잡아채 아나트에게 가져다 댄다. 목을 노렸을 손놀림은, 아나트가 급하게 몸을 비튼 탓에 어깻죽지를 스치는 것으로 끝난다. 아나트는 사방으로 퍼진 루비와 진주들을 바라보다 다시금 도로테아의 목을 쥔다. 그전까지는 고정을 시키는 듯한 손짓이었다면, 이번엔 살의가 담겨있었다. 어깨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색의 진득한 피가 어깨를 넘어 팔로 흘러 내렸다. 도로테아의 얼굴과 가슴팍 위로, 아나트의 피가 조금씩 물들었다.
“ 도로테아. 솔직해져봐요. 당신은 절 싫어하시지 않으시잖아요. 절 아껴주셨죠. 당신이 날 원하고 있었던 건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어요. ”
왜, 제 제안을 거절하시는건지 모르겠네요. 떨어진 향초가 러그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냄새가 저택을 가득 메웠다. 도로테아는 아나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검은 연기와 일렁이는 불을 바라보았다. 아나트는 여전히 도로테아의 목을 강하게 옥죄고 있었고, 점점 숨이 가빠왔다. 도로테아는 발버둥을 치며, 헐떡거렸다. 그 어느 날처럼. 무력감이 온 몸을 감쌌다. 차가운 그 손이 도로테아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내리는 것 같았다. 점차 움직임이 느려졌으나, 도로테아는 마지막으로 아나트를 바라봤다.
“ 넌 주인을 모신 적이 없어... 다 네 꼭두각시였을 뿐이지. ”
너는 그 누구와도 이어질 수 없어. 저주받은 말은 결국 기침으로 끝났다. 동시에 눈앞이 흐려졌다. 너무 오랫동안 방치된 결과였다. 도로테아는 불씨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나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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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가장 큰 산불이 났다. 가을 장마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번진 불은 마을 언덕위에 있던 맥블랙 가의 별장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저택 바깥에 있던 도로테아 맥블랙 남작만이 살아남았고, 경관과 용의자로 의심받던 고아는 그대로 불에 타 재가 되어버렸다. 너무 강한불에 그슬려, 시체의 흔적은 조각 조각 떨어져 있었다. 마을에 있던 사람들은 구조된 도로테아가 어떤 일을 할까 두려워했지만, 도로테아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마차를 불러 마을을 떴다.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끔찍한 목소리가 마을을 가득 메웠다. 허나 이제 추억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도로테아는 떠났고, 더 이상 맥블랙가 사람들이 마을에 들리는 일은 없을 터였으니까.
도로테아는 런던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저택에 쳐박혀 자신이 당했던 그 끔찍한 밤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꿈은 언제나 그 촌년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제게 사랑에 빠진 것처럼 굴던 표정부터, 목을 조르던 그 표정까지. 값싼 보석같은 자색 눈이 일렁거릴 때면, 도로테아는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잠에서 깼다. 가끔은 울부짖으며 일어났으며, 헐떡거리다 손에 잡히는 모든 물건을 던져버린 적도 있었다. 맥블랙 가에선 도로테아가 그녀의 조모처럼 광증에 걸린 게 아니냐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도로테아는 적어도 깨어있을때는 그 전과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주일이 지난 후, 도로테아의 악몽을 아는 건 그녀의 아침수발을 드는 하녀들 뿐이었다.
도로테아는 충동적으로 런던 외곽으로 마차를 몰았다. 있는 거라곤 황폐한 들판과 낮은 언덕만 있는 곳으로. 도로테아는 아나트를 떠올리는 장소에서 그녀를 완전히 잊을 준비를 했다. 외곽에 도착하면, 노을이 지는 시간이었다. 주홍빛이 멀리 있는 도시를 감싸고, 자신의 얼굴 위도 뒤덮어버렸다. 도로테아는,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마차로 돌아왔다. 마차 주변엔 아름드리나무가 있었는데, 런던 근교인 탓인지 사람이 있었다. 누군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수한 실내복을 입고, 머리엔 진주로 장식한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도로테아가 본능적으로 나무에 가까이 간 순간, 나무에 기대앉아있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제일 먼저 엷은 자색눈과 마주쳤다. 진주귀걸이를 달고, 장미를 가슴팍에 꽂은 여자였다. 검은색 드레스는 장례식을 연상케할 정도로 수수했다. 혹은 하녀복을 떠올리게 했다. 도로테아는 나무 밑으로 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모자 사이로 어슷하게 빠져나온 올리브빛 머리카락, 여유로운 미소. 창백한 피부를 물들인 노을. 모든게 너무나 익숙했다. 자신을 죽이려 들던, 자신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자신을 그 저택에 버려두고 간. 도로테아는 저게 자신만이 보는 환각임을 확실히 해야했다.
“ 오랜만이에요 남작님.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
자신을 오래도록 보살피던 소녀가 거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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