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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 합작 고딕호러
    합작 고딕호러
  • 2021년 10월 29일
  • 15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31일








Side L - 루카스 하이드의 경우

w. 감탱



루카스는 제 얼굴을 수건으로 닦았다. 그는 쉽게 찢어지거나 해지지 않을 것 같은 튼튼한 옷을 입었다. 그 옷은 튼튼하다는 것 말곤 별 특별한 장점이 없는 옷이었다. 아주 뻣뻣하고 질겨서 팔다리는 잘 구부려지지 않고, 썩 미관에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질기고 거칠기로 소문난 짐승의 가죽을 잔뜩 엮어 만든 그 옷은, 짐승의 털도 여즉 남아 있는 데다 입으면 누린내가 온 몸에 배었다. 루카스는 짐승을 잡아야 할 때마다 그 옷을 입었다. 짐승의 숨통을 끊고, 그것의 피를 뺀 뒤 가죽을 분리한다. 뼈는 바르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의 일은 가죽까지만이었다.


오늘 잡은 사냥감은 어린 사슴이었다. 원래라면 잡아서는 안 될 크기였다. 하지만 이제 와 동물들의 발길마저 끊긴 지금, 가릴 처지가 못 된다는 걸 잘 알았다. 루카스는 짐승을 잡아야만 할 때마다 짐승의 두 눈을 가리고 미안해, 라며 말을 건넸다. 짐승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이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일에 익숙해지고 말 것 같아서 그랬다. 루카스는 짐승의 눈을 흰 천으로 가리고, 목을 찔러 단 번에 숨통을 끊었다. 짐승은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적절한 손질을 거친 후, 루카스는 사슴의 각 다리에 끈을 묶어서 어깨에 들쳐멨다. 가죽만 잘 발라 냈다면 신선도는 어찌 되었든 상관 없던 탓이었다. 루카스가 지금 있는 곳은 숲 외곽에 있는 사냥꾼의 산장이었다.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면 그의 저택으로 갈 수 있었다. 루카스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산길 아래를 따라 걸었다. 말이 그의 저택이지, 엄밀히 따지면 그의 것은 아니었다. 그가 기거하는 곳은 맞았으나.


루카스는 저택의 철문을 한 손으로 열었다. 관리가 되지 않은 쑥대밭의 정원과 물이 다 말라 버린 분수대가 눈에 들어 왔다. 한때 그는 이곳이 아주 풍요로웠을 때를 기억했다. 샘물보다도 더 맑은 물이 분수에서 끊임없이 솟았고, 이름을 잘 몰랐지만 아름다웠던 꽃들이 가득 피워져 이곳을 장식했다. 정원 한가운데에 있는 쉼터에는 노란 장미넝쿨이 아름답게 감싸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허상이자 과거의 잔재였다. 이제 이 정원은 썩은 내와 흙내만 가득한 폐허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루카스는 흙을 쓸어내지 못한 정원길을 따라 걸으며, 어린 사슴을 고쳐 들었다. 관리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이 정원이 이런 꼬락서니가 된 것도 맞기는 했으나, 이 땅이 더이상 식물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다는 것도 맞는 말이었다. 이따금 생명력이 끈질겨 주변을 다 죽여 버린다는 잡초들만이 무성하게 자라났다가, 며칠도 안 가서 그것들조차 시들어 썩어 버리곤 했다. 루카스는 이내 저택 현관에 손을 대었다. 문은 손을 더 대지 않아도 자연히 열렸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 왔지만 아주 기묘한 곳이었다. 문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서, 사위 분간이 도무지 되지 않을 만한 곳이었다. 그래도 루카스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하루 이틀 이랬나. 가볍게 한숨이나 푹 내쉬며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의 주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신체는 섣불리 어둠 안에 묻혔다. 어둠은 쉽게 녹는 성질이 있어서, 루카스는 이내 점도 낮은 어둠을 헤칠 수 있었다.


*


루카스 하이드는 일개 하인은 아니었다. 자식도 특별한 가족도 없던 전 집주인 드마쉬 남작 부부는 어릴 때부터 하인으로 들어왔던 루카스를 아주 귀애했다. 별 문제가 없었다면 드마쉬 남작 부부의 유산이 모두 하인들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꼭 그걸 위해서 하인들이 이곳에 붙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드마쉬 부부는 하인들에게 잘 해주는 고용주였다. 하인들은 이곳에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일했다. 그 누구도 이곳을 쉽게 그만두지 못했다. 좋은 고용주 아래로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모이기 마련이던가. 오래 전 이야기였다. 드마쉬 가 내외는 마차 사고로 둘 다 죽었고, 붕 뜬 재산은 드마쉬 남작의 아들이라는 자가 나타나 홀랑 가져가 버렸다.


그 아들이라는 자가 문제였다. 드마쉬 남작은 재혼이었고, 전 부인은 남작과의 불화로 일찍이 헤어졌던 걸로 알려져 있었다. 루카스는 그 당시 저택과는 연이 없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었지만, 함께 일하던 나이 든 이들이 입을 모아 말했던 걸 보면 있었던 일이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그들의 말로는 전 부인은 ‘결혼이 어울리지 않는 이’라고 했다. 결혼을 하기보다는 자신의 일에 집중하거나 집안을 일으켜야 할 것 같은 여장부. 그런 이미지였던 모양이다. 드마쉬 남작과 헤어질 때에는 일곱살 난 아들 하나, 뱃속에 아이가 하나 더 있었단다. 그렇다면 자식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루카스의 의문에 유모 일을 했던 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전 부인이 제 친정으로 돌아가면서 아이들에게 아는 척도 할 생각 말라며 얼마나 으름장을 놓던지! 그래서 그 뒤로 유모였던 그조차 제가 기르던 아이를 만나지 못했단다. 그런 아들이 왜 이제 와서 나타났는가, 그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내놓을 사람은 없었다.


첫째는 아니야. 그 아들이라는 자가 제 변호사를 끌고 저택에 왔을 때, 늙은 정원사가 소곤거렸다. 첫째는 저렇게 드마쉬 남작을 빼다 박지 않았다고 했던가, 되려 제 신경질적인 어미 쪽을 닮았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 나타난 남자는 드마쉬 남작의 이목구비며 밝은 금발까지 빼다 박았다. 결별 당시 뱃속에 있었다던 둘째아들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제 아버지가 더더욱 기억나지 않을 텐데, 여기까지 웬 일이지. 하인들의 미심쩍은 눈을 보기라도 했는지, 아들이라는 자가 -놀랍게도 꽤나 미인이었다.-화사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다들 제가 이곳에 온 게 꽤나 의아하실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

“걱정 마세요~ 당장 당신들을 죄다 내쫓아버린다든가, 그런 일을 하러 온 건 아니고. 저는 그냥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러 왔거든요.”


유언? 모두가 의아해하자, 남자의 옆에 서 있던 냉랭한 인상의 변호사가 서류 몇 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유언장. 남작 폴 드마쉬는 소유의 땅과 머랩하우스 저택, 은행 자산과 고용인에 대한 권리 등, 재산 모두를 차남 ‘미르라 프랑킨센스’에게 증여한다. 이 유언은 나의 사망으로 효력이 발생한다. 변호사가 유언에 대한 내용을 또박또박 읉는 동안, 누군가가 딸꾹질을 시작했다. 루카스 본인은 아니었다. 히끅, 히끅… 그런 성가신 소리 사이로 남자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제가 미르라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지내게 될 거예요. 다들 잘 지내 봅시다.”

“...“

“흠~ 나 지금 홀대받는 건가? 씁쓸하네…“

“아, 아닙니다. 도련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남작이 저런 유언을 언제 남긴 거지? 그때 하인들은 모두 서로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고, 그때 루카스는 남작과 쏙 빼닮은 아들, 미르라의 얼굴을 몰래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자가 아닌 게 아니냐며 의심하기엔 남작의 젊은 시절 초상화와 생긴 게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단순 호기심으로 슬쩍슬쩍 지켜본 것 뿐이지만, 그때 루카스는 결국 미르라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려 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미르라는 어쩐지 간사해 보이는 눈웃음을 루카스에게 돌려 주었고, 루카스는 데인 것처럼 티나게 고개를 돌렸다.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노골적인 웃음을 지우지 않고 미르라가 말을 이었다.


“자, 여러분은 이제부터 저와 함께 지내게 될 테니. 서로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걸 나누면 정말 좋겠죠? 서로 얼굴 붉힐 일이 없는 쪽이 더 좋잖아요~”

“...“

“아무래도 제가 고용주 쪽이니까~ 제가 먼저 말하는 게 좋겠죠? 우선 첫째. 제 방과 지정한 방에는 아무도 들어 오지 마세요. 꼭대기 층의 아버지가 쓰던 방을 계속 쓸게요. 그 층 맨 끝의 창고도 안 돼요. 그 안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 오든… 신경 쓰지 말고 할 일들 하세요.”


무슨 조건이 그래? 다들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일 쯤, 남자가 말을 이어 갔다.


“둘째. 매 주마다 야생동물을 사냥해서 가져와 주세요. 숨통을 끊어서 피를 빼고 가죽을 제거한 것이면 돼요. 내장은 빼지 말아 주시고요. 날짜는… 금요일이 좋겠네요. 저번주에 가져온 것보다는 더 큰 것을 가져오는 쪽으로 해요. 그러니 시작은 다람쥐 정도가 좋겠죠?”

“그리고 마지막. 먼저 말했던 두 가지를 지키지 않았을 때의 불이익은 제가 책임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알아서 잘들 합시다. 알겠죠?”


좌중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남자가 말한 규칙이라는 게 하나같이 다 기이하고 희한한 것들이라서 그랬다. 남자가 주변을 웃는 낯으로 둘러보고는,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대답은요? 그 간결하지만 뼈 있는 말에 하인들이 모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글생글 웃는 낯에 아주 순하게 생겼지만 방심하면 안될 것만 같은 인물이었다. 그래서인지 모두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하며 확인하듯이 다시 훑고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바로 루카스의 앞에 서서는,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살갑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 나이도 엇비슷하게 보이는데 말 놓을까요? 그런 말이 이어지는 동안, 얼이 빠진 루카스는 얼떨결에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루카스는 시선을 마주하고 몇 번이고 악수를 나눈 뒤에야 우리가 ‘만난 적 있는’ 사이임을 기억했다. 어렸을 때 남작이 어린애를 초대한 적 있었다. 남작은 저택에서 일하던 직원 중 유일하게 어렸던 루카스가 홀로 쓸쓸해보인다며 아이를 하나 불렀다. 남작과 같은 금발머리였고, 지나치게 활발하며 오지랖이 넓어서 성가신 상대였다. 루카스는 계속 쫓아와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 아이를 피해 도망이나 다녔고, 그 애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뒤를 쫓았다. 남작이 한 번 루카스에게 ‘친구가 생긴 기분이 어떻느냐’고 물은 적 있었는데 그때 루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귀찮긴 하지만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요.” 그는 어떻게 보면 루카스의 첫 친구나 다름없었다. 진짜 남작의 아들이었는지는 그때 처음 알았다지만.


남작의 둘째아들이 저택으로 이사 온 뒤, 저택에는 끊임없이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밤마다 무언가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남자의 비명인 것 같기도 했고,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소리는 밤새도록 끊이질 않고 남작의 방 쪽에서 들려 왔다. 밤마다 들려 오는 소리에 모두가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일에 집중하지 못한 탓에, 금요일에는 약속대로 야생동물을 바치지 못했다. 그 대가는 퍽 참혹했다. 다음 날 저택 앞에 짐승의 발톱에 찢겨 죽은 것 같은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의 정체는 주방 보조였다.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던 와중에도 그들의 새 주인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뒤늦게 나와 상황을 확인했다. 미르라는 시체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유해를 수습해서 제 방으로 모두 가지고 올라갔다. 그 뒤로 유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뒤로 그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할 때마다’ 찢겨 죽은 희생자가 계속해서 나왔다. 저주라도 받았는지 땅이 말라 식물들이 모두 죽고, 물이 더 이상 나오게 되기도 했다. 저택이 위치한 땅은 죽어 갔다. 그러자 많은 하인들이 일을 그만 두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유모와 정원사까지 건강 악화로 나간 뒤에야 루카스는 자신이 이 저택에 마지막으로 남은 하인이라는 걸 깨달았다. 혼자 남은 루카스에게 주인은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시키는 일을 훌륭하게 해 내면 죽지 않게 해 줄게. 걱정하지 마.


물론 루카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보아 왔던 것들을 토대로, 주인의 요구사항을 무시했다가는 큰일이 날 거라는 판단을 했을 뿐이었다. 드마쉬 남작 부부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그는 마구간지기였다. 루카스는 사람보다 동물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제가 아끼고 사랑하던 말 ‘리지’를 제 손으로 죽여 주인에게 바쳐야만 했다. 신기하게도 짐승을 죽이거나, 사람이 죽어나간 뒤에는 밤마다 들려 오던 끔찍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그날은 푹 잠들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루카스가 길게 잘 수 있었다는 건 아니었으나.


루카스는 꼭대기 층까지 한 번에 올라가서 주인님의 방을 두드렸다. 똑똑. 안에서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 소리 역시도 한두 번 들었던 소리가 아니었으므로 루카스는 태연했다. 이내 문이 살짝 열리고, 예의 주인의 매끈한 얼굴이 드러났다. 흐트러진 금발과 창백한 피부 따위가 컨디션이 썩 좋게 보이진 않았다. 주인이 루카스에게 물었다. 쇳소리 섞인 목소리였다.


“물건은?”

“...가져왔습니다. 어린 사슴밖에 잡히지 않아서.”

“사슴이라면 새끼 멧돼지랑 비슷하려나. 일단 앞에 내려 두고 가.”

“네.”


루카스는 시키는 대로 사슴을 방 앞에 내려다 두었다. 피비린내와 사슴 누린내가 짙게 풍겼다. 몸을 씻을 만큼의 물을 가져 오려면 저택 밖으로 다시 나가서 길어 와야 했다. 벌써부터 일이 한 짐이라 루카스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 방 안에서 쾅!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나무 가구를 벽에 집어던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이크, 능청스럽게 놀라는 체 하던 주인은 루카스의 얼굴에 시선을 두다가, 친히 몸을 더 앞으로 가까이 숙여 그의 귓가에 입을 두었다.


“너는~ 나를 믿지 않지?”

“...아닙니다. 주인님을 믿어요.”

“아닌 거 다 알아. 하지만 이번에는 좀 믿는 게 좋겠어.”

“...”

“자기야. 여길 벗어나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방까지 가서 문을 잠가. 내가 보기엔 오늘은 밖에 안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흠, 정말 알고 싶어?”


네가 감당할 수 있겠니? 그런 의미의 웃음소리가 났다. 루카스는 시선을 아래로 쳐박았다. 묻기는 했지만 별로 이유를 알고 싶진 않았다. 주인이 한 번 더 강조하듯 속삭였다. 뒤 돌아보지 말고 가. 시간 없으니까 빨리. 이내 주인은 루카스의 어깨를 잡아 돌리고는, 등을 확 밀었다. 루카스는 그대로 얼떨결에 달렸다. 시키는 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아래층의 제가 쓰던 방으로 한달음에 들어가서는 문을 바로 걸어잠갔다. 숨을 미처 고르기도 전에 문을 쾅! 하고 거세게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루카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이미 알고 있었다. 주인이 등을 떠민 뒤로 루카스의 뒤를 줄곧 쫓아오던 묵직한 발걸음이 있었다는 게. 그 걸음은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거웠고, 어렸을 때 숨어서 지켜보던 곰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루카스는 씻지도 못한 채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크게 한 것도 없었는데 피로감으로 잔뜩 달아올라 뒷목이 당겼다. 그는 찌뿌둥하게 굳은 어깨 근육을 손으로 풀며 생각했다. 주인님은 대체 위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이제 와서 하기에는 너무 늦은 의문이었다.


동물의 시체를 바쳤으므로 무사히 넘어갔어야 하는데, 역시 작은 사슴을 바친 게 문제였을까. 그날 밤은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게 종일 들려 왔다. 제일 끔찍한 점은, 꼭대기 방에서 들렸어야 할 소리가 그날은 루카스의 방 앞에서 끊임없이 들렸다는 점이었다. 루카스는 말끔한 행색의 주인이 직접 데리러 오기 전까지 침대에 웅크린 채로 끔찍한 시간을 버텨 내야만 했다.



Side M - 미르라 프랑킨센스의 경우

w. 괴장축


미르라는 오래 전에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날 때 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단순히 ‘돌아가셔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미르라는, 열 살이 되던 해의 겨울 한 편지를 받았다. 사랑하는 내 아들 미르라에게, 정갈한 글씨로 쓰인 편지는 ‘폴 드마쉬 남작’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미르라는 자신에게 온 편지였으므로 아무런 의심 없이 편지를 열어보았다. 내용은즉슨 이랬다. 태어나는 것도 보지 못했지만 너는 내 아들이니 그립지 않을 수 없구나. 네가 원한다면 우리 집으로 초대하마. 뒷장에는 간단한 약도와 차비로 쓸 수 있는 금액 얼마가 동봉되어 있었다.


어리고 멋모르는 나이였지만 그 딴에는 퍽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게 정말 제 아버지에게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대뜸 이곳으로 오라는 편지를 믿지 말라는 교육 정도는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르라는 제 딴엔 정성스레 답장을 보냈다. 당신이 제 아버지라는 증거를 보여 주세요. 그의 아버지는 답장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어머니, 형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미르라와 지나치게 닮아 누가 봐도 제 아버지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진을 받은 미르라는 이 아버지가 과연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마차를 불러서 홀로 움직였다. 고작 열 살 정도 된 애가 어떤 사고도 없이 모르는 사람의 집까지 가게 된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들이었다. 미리 알아채고 그 집에 가지 않았더라면 제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이나.


보통 남편과 전 부인 사이의 자제가 온다고 하면 꺼려하는 게 정상 아니던가? 하지만 드마쉬 남작부인은 어린 미르라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이었다. 제 아버지라던 드마쉬 남작도, 남작부인도 미르라에게 꽤나 친절했다. 미르라는 그 집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며칠을 보냈다. 미르라가 조금이라도 멍청한 아이였다면 마냥 잘 해주는 어른들 사이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냈겠지만, 미르라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애는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이 사람들이 자신에게 원하는게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이미 아는 영악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 어른들 사이에서 유달리 독특한 존재가 하나 있었다. 미르라 또래의 어린애였다. 그 애는 마구간에서 일했다. 말에게 먹이를 주고 빗질을 하며 마구간 바닥을 정돈하는 게 그 애의 일과였다. 미르라는 이따금 그 애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갔다. 하지만 소년은 또래 어린애들과 어울리는 데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늘 비슷한 추격전이 이어졌고, 미르라는 그때 처음으로 ‘가까이 오지 말고 다른 데 가서 놀아!’ 따위의 축객령을 들었다. 세상에, 축객령이라니! 다들 나한테 잘 해주는데! 물론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 전에 미르라는 궁금했다. 도대체 뭐가 잘나서 혼자서만 저러고 있는 걸까? 미르라가 생각하기에 이곳은 나이 들고 고지식하기까지 한 어른들만 있는 곳이라 혼자 있어봤자 그리 재미있지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애가 부모를 일찍이 잃고 드마쉬 남작 부부에게 거두어져 아들처럼 길러진 애였다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때 미르라의 감상은 이랬다. 아들처럼 기른다더니 마구간 일은 왜 시키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지막 날 아버지가 저택을 보여주겠다며 그를 끌고 가기 전까지는 그랬다.


*


미르라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아침을 장식하는 새 소리처럼 아름답고 청량한 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껏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거칠고 탁한 울음소리는 미르라의 귓가를 계속 맴돌아서 일어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면 침을 뚝뚝 흘리는 거대한 입이 코 앞까지 와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미르라를 한 입에 집어삼키지 못하고 아쉽다는 듯이 입을 물렀다. 미르라는 그것을 모두 지켜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언젠가 저것이 자신을 온전히 집어삼키는 날도 올 것이다. 아무리 그가 각오한 일이라고 해도 무섭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저택의 주인으로 감내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어슴푸레한 바깥을 내다보았다. 식물은 죽었고 물은 말랐다. 저택의 밖에는 녹음이 우거져 있었지만 높은 담장이 바깥의 생명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이곳은 이미 지옥이었다. 미르라가 원한 적 없이 그는 지옥의 주인이 된 셈이다. 지옥의 주인이란, 꽤나 고독하고 지루해서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 그는 데리러 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하필이면 어제 ‘그것’의 심기가 영 좋지 않아 실수를 저질렀다. 그 탓에 애꿎은 애만 휘말려서 밤새 고생했을 테니 책임은 져야지.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서류를 정리했다. 아무리 그라도 해도 뜨지 않았는데 찾으러 가는 건 미친짓이었다. 제가 찢겨 죽기라도 하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테니 그는 느긋하게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테이블 위의 서류들은 오래된 것이었다. 처음의 유서, 마지막으로 수정한 유서, 아버지의 편지, 형과 어머니가 번갈아 보내 온 편지. 그중 어느 것도 미르라가 쓴 것이 없었다. 미르라는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을 꺼내들었다. 처음의 유서는 그의 아버지가 자필로 쓴 것이었다.


재산을 모두 상속하고, 자신의 작위까지 모두 제 후계자에게 물려주겠다는 내용의 유서는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남작이 이걸 언제 준비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었다. 그 유서에는 특이하게도 상속인이 이행해야만 하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상속인은 목숨을 잃기 전까지 저택을 떠나서는 안 된다.’ 미르라는 그 유서를 천천히 읽어내렸다. 느긋하게 움직이던 시선이 상속인의 이름 칸에 멈추어 섰다. 상속인, 저택의 하인 루카스 하이드에게 재산과 작위 모든 것을 상속한다. 상속인, 루카스 하이드. 그는 비죽 웃음을 흘렸다.


아들아, 저택은 너를 원한다. 그의 아버지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나와 혈육인 후계자가 필요해. 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너 뿐이다. 그때 미르라는 아버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방의 구조를 구경했다. 반쯤 부서진 가구들과 죄 뜯긴 벽지, 툭 건드리면 떨어질 것처럼 위태하게 달려 있는 샹들리에, 그리고 안을 가득 메운 짐승의 누린내가 퍽 인상깊은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지체 높은 남작님이 기거할 만한 방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미르라는 천진난만하게 질문했다.


“아버지, 이 방은 청소를 안 하세요?”

“해도 소용이 없어서… 미르라, 아빠 말 듣고 있는 거니?”

“그럼요. 아버지. 멋모르는 어린애를 불러서 어떻게든 해 먹어 보려는 거, 아주~ 잘 알겠어요~”

“그런 의도가 아니라.”

“차라리 형을 부르는 게 나으셨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형이라면 마음이 약해서 들어줬을 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뻔했다. 아들같이 키우던 애가 적합하지 않으니 애저녁에 진즉 결별한 아내의 아이에게 연락이나 넣어본 거겠지.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지금 남작부인은 자식을 낳을 수 없었던 모양이니. 믿는 구석은 여기 뿐이었을 테다. 정말이지 특별할 것도 없는 진상이었다. 미르라가 잔뜩 질려서 심드렁해질 무렵, 그의 아버지가 퍽 간절하게도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에겐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아들아. 우리에게는 ‘그것’을 감시하고 견제할 의무가 있다는 것 정돈 알겠지?”

“도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겁을 먹으신 거예요? 아버지. 어디서 이상한 짐승을 평범한 강아지인 줄 알고 매입해 오시기라도 한 거예요?”

“강아지라니. 강아지라니! 그런 어줍잖은 작은 동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 아들아. 이 저택이란다.”

“저택이 뭘요?”


그의 아버지는 무어라고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저택이 먼저였다. 쿵, 미르라의 등 뒤에서 무언가 벽을 치는 둔탁한 소음이 들렸다. 그것은 아주 불만스럽다는 듯이 몇 번을 쿵쿵댔는데, 그 박자가 점차 빨라진 탓에 점점 더 무시하기가 어려워졌다. 드마쉬 남작은 한껏 희게 질려 방문 쪽으로 성급하게 걸었다. 문을 한 뼘 만큼 연 뒤에 바깥에 서 있는 하인에게 손짓했다. 이어 하인은 남작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쥐덪에 걸렸을 법한 커다란 쥐의 시체였다. 남작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 상당히 결벽을 떨 것처럼 생겼는데도 거리낌없는 손길로, 방의 구석으로 냅다 집어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직접 보는 게 낫겠구나. 쥐 시체는 철퍽, 끔찍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내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그래.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앙상한 나뭇가지 같기도 했고, 무언가의 팔 같기도 했는데, 나뭇가지라고 하기엔 이상하리만치 미끈거렸고 팔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길고 유연했다. 미르라는 무심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팔은 쥐 시체를 한 손에 움켜쥐고는 그대로 들어올렸다. 킁킁, 냄새를 맡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들리고는, 팔을 어둠 속으로 도로 끌고 갔다. 이내 까득까득 뼈채 씹어먹는 소리가 한참을 울렸다. 어린 아이는 그 괴기스러운 것을 내내 듣고, 맡고, 보고, 느끼며 감내해야만 했다. 그 폭력을 방관하던 아이의 아버지가 끔찍한 소리를 뚫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들아, 미안하구나. 저택이 너를 원해. 너를 위해 이곳으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저택의 ‘주인’은 저택 안에 있어야만 안전하니까.”

“...”

“너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하루빨리 네가 이것의 정체를 알고 대비하는 것. 그것 뿐이라고 생각했단다.”


정말 미안하구나. 사실 그 뒤부터 미르라는 아버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실수였다. 그는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덫에 걸리고 만 것이었다. 거대하고 달콤한 쥐덫에. 저택은 식사를 모두 마쳤는지 금방 조용해졌다. 남작은 제 아들을 데리고 방 밖으로 나서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


그는 느긋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다른 쪽 손에는 따뜻한 차가 담긴 찻주전자와 찻잔을 올린 쟁반이 들려 있었다. 원래라면 방 안에 있는 상대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차마 그런 일을 하지는 못했을 테니 그가 친히 시중을 들기로 마음먹었다. 안에서는 인기척 하나 나지 않았지만, 미르라는 그가 잠도 못 자고 숨만 죽인 채 문을 노려보고 있을 거라고 한 번에 알아보았다. 똑똑, 한 번 더 노크하자 안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미르라는 상냥하게 대답했다. 문 좀 열어주지 않을래? 문은 한참 뒤에나 천천히 열렸다. 잔뜩 긴장으로 움츠린 어깨와 말도 못 할 정도로 상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르라는 문을 제 손으로 더 당겨 열었다. 그리고 상대에게 웃는 낯으로 말을 걸었다.


“한숨도 못 잤겠군?”

“...일에는 지장 없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응? 아냐~ 한동안은 얌전할 테니 오늘은 푹 쉬는 게 좋을 걸. 들어가도 돼?”


그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상주 하인은 이 남자 뿐이었으므로 그는 남작부인이 쓰던 좋은 방을 하인에게 내어 주었다. 어차피 힘들게 살 거 방이라도 좀 좋은 걸 쓰라는 의미였으나, 이렇게 보니 관리는 하나도 되지 않아서인지 쓸데없이 넓고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차라리 방을 합치는 게 나으려나, 그런 생각을 이으며 그는 티 테이블에 가져온 쟁반을 내려 놓았다. 배고프지는 않고? 묻자, 남자는 퀭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기사, 제가 보기에도 식사보다는 잠이 더 필요한 몰골이기는 했다. 그는 가져온 차를 따라 남자에게 내밀었다.


“마셔. 수면에 좋은 차야.”

“...”


주인이 가져온 차까지 거절하긴 어려웠는지, 남자는 찻잔을 받아서 억지로 목구멍에 밀어넣는 것 같았다. 몇 모금 마시는 걸 본 뒤에야 미르라는 만족했다. 수면에 도움이 되는 차가 맞기는 했다. 원래는 미르라가 밤마다 들려오던 끔찍한 소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마시려고 구비했던 것이었다. 거기에 수면제까지 한 스푼 더 탔으니, 아무리 건장한 장정이라도 한 잔 다 마시거든 한나절 동안은 잘 게 분명했다. 그러나 더 마시지 않고 한참이나 찻잔을 만지작대던 남자, 루카스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주인님.”

“말해도 돼. 왜?”

“언제까지 이래야 합니까?”


그의 말에는 주어가 없었고, 아주 본질적인 것이었다. 미르라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굴리며 생각하듯 오래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내’가 만족할 때까지?”

“...”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 해. 까먹지 말고~ 알아 들었지?”

“...네.”

“그래. 착하다.”


좀 자 둬. 그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수면제가 돌아 슬슬 졸린지 그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미르라는 루카스가 잠에 못 이겨 의식이 흐려질 즈음 다가가 그의 신체를 가뿐히 안아 들었다. 퍽 건장한 사내였음에도 그는 상대를 무리 없이 침대 위로 옮겨 그를 눕혀 주었다. 이불까지 끌어 덮어주고, 마치 연인을 대하듯이 이마에 입술까지 맞추는 꼴이 퍽도 상냥했다. 좋은 꿈 꿔. 꿈이라도 행복해야 하지 않겠어. 그는 마지막으로 잠자리 주변을 살뜰히도 살펴 주고는 방 밖으로 나섰다.


주인님,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미르라는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누구인지 알고 있던 탓이었다. 말하라는 듯한 손짓에 목소리가 이어 대답했다.


“목표물을 찾았습니다. 짐작하신 대로 멀리 가지 않았더군요.”

“신병 확보는?”

“아직입니다만… 며칠 걸리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다음 번엔 더 좋은 소식을 기대할 수 있겠네?”


그 말에 대답하듯 목소리, 늙은 정원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그 정원사는 미르라가 유언을 이행하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가장 먼저 알아본 이였다. 공식적으로 저택에서의 일을 그만둔 이로 되어 있기도 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저택에 묶인 이들 중 그 누구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들은 일련된 목표로 저택의 새 주인과 단합하여 장기 외출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끔 일을 그르쳐 피를 조금 보긴 했지만, 이전보다는 위험도가 덜한 선택이었다. 미르라는 그가 보고를 마쳤음에도 물러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그가 다시 손을 들자, 발언권을 얻은 정원사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응.”

“‘그들’이 살아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저라면 눈치채지도 못한 채로 당하기만 했을 것 같은데요. 정원사의 감탄 섞인 질문에 미르라는 침음하듯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는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동안 생각한 뒤에, 말을 꺼냈다.


“남작은 나한테 거짓말을 총 세 번 했어.”

“세 번이나 말입니까?”

“그래. 첫째로 저택이 남작의 혈육을 원하긴 했지만 그게 반드시 나일 필요는 없었던 것. 둘째로 남작부인은 불임이 아니었던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 우리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해? 얼른 떠나자. 빨리 새로운 곳에 정착해야 우리 아기도… 미르라는 남작부인이 실수처럼 내뱉었던 어느 문구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그가 그를 곱씹자, 정원사도 입을 다물었다. 그건 미르라만 들은 게 아니었으므로 아주 흔하디 흔한 공통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미르라가 새삼스럽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남작부인만의 잘못은 아니었겠지. 두 사람의 합의였을 거야.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를 꽤나 사랑했을 거고? 사랑하는 두 사람의 친자식이 험한 꼴을 당하기를 원치 않았던 거고.”

“그렇다면 주인님은 왜…”

“전 부인은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을 테니까. 거기다…”


드마쉬 남작의 친자지만 남작과 어떤 유대도 생기지 않은, 서먹한 사이의 자식. 저 말고 적임자는 없었다. 미르라는 유달리 남작과 닮아서 선택된 게 아니었다. 남작이 가장 사랑할 이유가 없는 핏줄이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었다. 아주 단순하고 비정한 이유였다. 미르라가 이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저택이 그의 손으로 떨어진 뒤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받아들인 동시에 행동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정보들을 끌어모으고,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말이 저택의 주인이자 남작이었지 쓸모도 없는 땅과 돈, 그리고 땅과 함께 귀속된 예비 먹이 - 하인들 뿐이었으므로.


“애가 태어나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을 거거든. 그래서 조금 성급하게 일을 처리한 모양인데~ 그러면 안 됐어. 낳더라도 흔적은 다 치우고 나가는 게 나았을 텐데.”


남작은 사랑하는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 부인과의 자식과 충성스럽던 하인들을 이용했다. 결과적으로 도망간 저택의 주인 때문에 저택이 폭주하고, 죽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죽었다. 그게 남작의 마지막 거짓말이었다. 저택의 주인은 한 사람이라도 남아야 하는 게 아니라, 주인은 모두 그 집에 남아야만 저택이 얌전해진다는 것. 이 부분은 드마쉬 남작조차 모르는 사실이었던 것 같으니 온전한 거짓말이라고 치기엔 애매하기는 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사람 뒤통수를 쳤다면, 저도 역이용당할 각오를 했겠지. 저택의 새 주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 올렸다. 그걸 가만 지켜보던 정원사가 새로이 질문했다.


“그 애에게는 게속 알리지 말까요?”

“모르게 해. 그 편이 나아.”

“하지만 오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원망을 할 지도 모르는데…”


미르라는 그때 처음으로 고개를 슬쩍 돌려 옆눈으로 정원사를 돌아보았다. 정원사는 그때서야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루카스의 방 근처에 있었으므로 언제 말이 새나갈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미르라는 걸음을 옮겨 장소를 이동했다. 정원사는 그 뒤를 따랐다. 그가 가볍게 걸으면서 끊겼던 말을 이었다.


“드마쉬 남작 부부는 그 애한테 부모나 다름 없었다며?”

“그랬습죠.”

“자네라면~ 어느 쪽이 더 좋을 것 같아? 부모처럼 믿고 따르던 자가 실은 저들만의 안위를 위해 모두를 배신했다는 진실과, 부모의 것을 모두 빼앗아 간 웬 모르는 남자가 자신을 마음껏 부려먹는 사실 중에서.”

“...”

“하인 일은 원래 그 애가 하던 일이었으니 계속 해야만 하고, 그 팔자는 어딜 가도 바뀌지 않겠지. 그렇다면 그냥 원망할 상대나 하나 만들어 주고 계속 살게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언젠가는.


도망간 배신자들을 잡아 저택의 분노를 잠재울 그 때면 그들의 일상도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될 테고, 다른 주인보다 훨씬 더 잘 해주는 주인 아래에서 나쁘지 않은 여생을 보내게 해줄 수 있었다. 본디 루카스에게 돌아갔어야 할 것들을 모두 제게 묶었지만, 그만큼 베풀어 주면 그만이었다. 상근 하인들이 일을 잘 해준다면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 주는 주인은 크게 드문 존재도 아니었다.


“배신과 슬픔보단~ 체념의 형태라도 미움과 원망인 쪽이 좀 더 생기 넘치지 않겠어? 사람 사는 것 같잖아.”


주인은 그 말과 함께 제 방으로 돌아갔다. 정원사는 그 자리에 우뚝 남아 제 주인이 남긴 말들을 곱씹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카스는 우직하고 거짓말을 싫어하며 올곧아서 도무지 휘어지지 않던 고집스러운 이였다. 루카스는 충성스러운 만큼, 한 번 돌아서면 그대로 떠나는 이기도 했다. 그러니 순간의 모면은 평생 가지 않는 이상,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인님, 이 역시도 언젠가 당신이 후회할 칼날이 되고 말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충언은 미처 제 주인에게 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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