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작 고딕호러
- 2021년 10월 30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31일

삶이 내려앉는 감각에 번쩍 눈이 뜨였다. 급하게 숨을 삼키고 창밖을 내다본 보람도 없이 마차는 길을 따라 한가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아마 바퀴가 지나는 경로에 작은 돌멩이가 하나쯤 놓여있었던 모양이다. 아주 작은 돌이었다면 마차의 무게에 반으로 쪼개졌을지도 모른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아도 두동강이 난 자그마한 돌의 모습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꺼지지 않는 화염처럼 하늘을 뒤덮은 노을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무심코 가슴께에 올린 손으로 심장 박동이 전해져왔다.
미엘레는 다시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가로로 길게 난 좁은 틈 사이로 마부의 등이 보였다. 심장이 다시 천천히 뛰게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돌이 부서지는 세월보다 훨씬 길었다. 그는 네모난 창에서 들어오는 붉디붉은 햇빛이 길게 퍼져들어와 마차 안의 공간을 새로이 덧칠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너희는 그런 악몽 꿔본 적 있냐? 그런 악몽? 같은 꿈을 계속 꾸는 거야. 속편이 있는 소설을 마저 읽듯이 말야. 그는 어제 낮에 훈련장에서 누군가가 대단한 이야기라도 하듯이 운을 띄운 그 말을 생생히도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겠는데, 다시 자면 무조건 꿈을 이어 꾸게 되는 거지. 설사 괴물에게 쫓기고 있었다고 해도. 야, 너 휴식 시간마다 너무 쓸데없는 영웅담을 많이 읽은 거 아니야?
동료 기사들이 킬킬대면서 웃는 동안에 미엘레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이 동의를 구하듯이 의견을 물었을 때 당황해서 얼버무린 것도 다 그것 때문이었다.
어릴 때 종종 꾸던 꿈이 있었다. 어떤 여자아이가 의자에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는 꿈이었다. 이때는 너무 어릴 적이라 기억이 흐릿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에 가까이 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린 자신이 뭘 한 건지 갈수록 꿈에서 의자에 앉은 아이의 고개 각도가 돌아갔는데, 말을 거는건 무서워 했었으면서 그 비현실적인 시간의 속도는 괴기스럽게 느끼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니까.
그 아이는 검은색의 드레스를 차려입고 있었는데, 미엘레가 입은 옷만큼 고급스러운 소재였지만 특히나 화려한 자수와 장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카락은 옷보다 더 검었다.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미엘레는 그녀의 뒷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돌려 미엘레와 시선을 마주쳤을 때, 깊고도 어두운 붉은색 눈에 미엘레의 모습이 비친 때에 그녀는 웃으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미엘레."
그 뒤로 그 꿈을 꾸지 않았다. 미엘레는 어린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다 해보았다. 혹시 내가 이름을 불러서 그런 걸까? 그날 그렇게 얼굴을 보지 않았다면 그 뒤로도 같은 꿈을 꿀 수 있었을까? 그 꿈은 미엘레가 아프기 전, 지금과는 달리 아직 많은 것을 잃지 않고 넉넉하게 사랑을 받던 시기에 찾아와 그의 어떤 지표가 되곤 했다. 책의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표시해두기 위해 끼워둔 책갈피 같은 거였다. 그저 너무 오래 되어, 그리고 때때로 사랑스러운 꿈은 꿈이었다는 사실만으로 꿈의 주인에게 상실감을 주기도 하므로 이제는 먼지가 쌓이는 낡은 상자 안에 넣어두고 문을 닫았던 꿈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미엘레는 노을에 잡아먹힌 벽을 보면서 그녀의 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꿈이 다시 미엘레의 밤을 노크한 건 몇 주 전부터였다.
"그렇게 걸터앉아있으면 위험해요."
"그런가요?"
그녀는 창밖으로 다리를 내놓고 앉아 있었다. 바깥으로는 난간도 없어 창틀이 무너지거나 몸을 숙이면 그대로 추락하고도 남을 위험천만한 자세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불확실한 위험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싶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휘날려 장막을 이룬 순간에 미엘레는 이것이 꿈임을 눈치챘다.
"저는…."
"제가 왜 이 꿈을 꾸는지 모르겠어요."
말을 꺼내놓고 미엘레는 조금 후회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말을 한 것 같았다. 어차피 꿈에 불과한데. 게다가, 답을 얻을 수 있다면 더 유용한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꼭 이런 생각은 중대한 결정을 하고 난 뒤에야 떠오른다. 미엘레가 멋쩍은 나머지 뒷목을 문지르면서 시선을 피하고 있자니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그녀가 미엘레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모르는 게 당연해요. 이건 당신의 꿈이 아니니까요."
"제 꿈이 아니라고요?"
"왼쪽이에요."
"예?"
"어서 와요. 다행히 늦지는 않았네요."
그녀가 한 말은 의문스러운 꿈의 주역이 아닌, 손님을 마중 나온 사람이 할 법한 대사였다. 언제나 꿈은 비논리적이다. 그걸 알면서도 미엘레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미엘레는 자신이 무어라 외친다는 자각도 없이 소리를 치면서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 * *
"…아."
선잠에 들었다 깨어날 때면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듯이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일이다. 하지만 아까는 달랐다. 깨어진 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차분한 속도를 되찾은 심장은 천천히 뛰고 있었다. 말들도 속도를 내지 않았다. 밤은 어두웠다. 모든 것이 느려지기만 하는 밤에 꿈만이 추락하는 별처럼 급하게 처박혔다.
재빨리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급하지 않은데도 그랬다. 서둘러 찾아온 밤 때문에 그의 손은 어둡고 흐릿하게만 보였다. 어둠은 얇은 장갑이 되어주었다. 굳은살과 작은 흉터들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베인 상처도 흉터가 될까. 상처. 그것이 미엘레가 휴가를 내고 명의가 있다는 영지로 가고 있는 이유였다. 그는 최근 들어 그 꿈을 꾸는 날마다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일부러 밤을 샌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꿈만 꾸고 나면 새벽이었고, 다시 자려고 눈을 감아도 커튼이 흔들리는 소리 혹은 적막이 너무도 크게 다가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뿐이다. 그는 정적에도 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랜만에 떠올린 걸지도 몰랐다.
당연히 미엘레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그래봤자 기침이 잦아지고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어난 정도지만, 기사에게는 그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결국 대련에서 팔을 베이는 부상을 입고 나서야 부단장이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실토하라고 했다. 명령보다도 부탁에 더 가까웠다.
악몽을 꾸고 있습니다.
그 한마디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더 추궁하지 않는 대신에,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차를 마셔보고도 차도가 없다면 의원을 찾아가라고 했다.
결국 이렇게 먼 영지까지 가면서도 미엘레는 이 방법이 옳은 일인가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악몽을 꾸지 않게 해주는 약초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어딘가에 앉아있기만 했던 그 사람이 오늘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는 것마저 불안의 땔감이 되었다. 확인하면 덧없이 사라지고 마는 불가사의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분노를 하는 건 아닐까. 이걸 다 떠나서, 나는 이제 더는 그 꿈을 꾸고 싶지 않은 걸까? 물론 매일 아침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세수를 하러 나가는 건 끔찍하게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오래 전에 꿈을 잃고 난 다음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고 이틀을 보냈다. 아니야, 예전 일이야. 나한테는 할 일이 있어.
"어, 기사님!"
"네, 네?"
갑작스런 마부의 부름에 손질하지 않은 덤불처럼 복잡하게 얽혀가던 상념이 단숨에 산산이 부서졌다. 미엘레는 얼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가 금세 목을 가다듬고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앞쪽에 갈림길이 나와서 말이죠. 그런데 마을로 가는 길에 이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습니다. 저도 처음 보고요. 마부는 의아하다는 기색이었다. 어디로 갈까요? 마차 안으로 은은한 달빛이 들이쳤다. 바람이 찼다. 틀린다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미엘레는 제발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빌면서 답했다.
"왼쪽으로 가주세요."
* * *
그날의 날씨는 유독 을씨년스러웠다. 미엘레는 세찬 바람이 창문에 부딪쳐 유리가 흔들릴 때마다 이대로 창이 깨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응접실이 조용한 탓에 그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렸다.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저택의 공기는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한동안 망설이던 미엘레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잡아들었다. 너무 뜨거우면 혀를 델지도 모른다는 평범한 걱정만이 그가 쉬이 차를 입에 대지 못한 이유는 아니었다.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그는 이 마을이 조용하면서도 시끄러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없는 곳은 지나치게 적막했고, 반대로 사람이 모여있는 곳은 유난히도 시끄러웠다. 그들의 목청을 듣지 않고 근처의 길가를 지나는 방법은 하나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건 그들의 목소리보다도 감정이었다. 그들은 울음보다도 깊은 슬픔과 비명보다도 뾰족한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마을에는 병이 돌고 있었다. 그들은 외지인을 반기지도 박해하지도 않았다. 몇몇 다정한 사람들이 미엘레를 볼 때마다 이 마을에서 빨리 나가는 게 좋을 거라고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악랄하게도 강도들이 그 점을 노려 마을을 왕래하는 마차를 습격하는 일이 잦다는 말에는 짙은 상실감이 배어 있었다. 오늘도 그렇게 사람이 죽어 돌아와 사람들이 울고 있는 거라는 말과 함께. 마을에서 나가는 왼쪽 길에서 급습이 있었다고 했다. 마을에서 나가는 왼쪽 길, 마을로 들어서는 오른쪽 길. 미엘레는 그들의 사연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꿈의 내용이 생각나 괜히 소름이 돋는 팔을 빠르게 문지르고는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 꿈. 꿈을 꾸지 않았다면, 혹은 사소하게 넘겨버렸다면 그들 사이에 자신도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엘레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이런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옅은 죄책감을 느껴야만 했다. 늦가을의 땅은 차가웠다.
하지만 햇살이 땅을 데우는 낮에는 다르다. 의사를 향한 평가도 그와 비슷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어떤 병이든 고치는(누군가가 참견한 탓에 그는 '고쳤던'으로 말을 바꿔야만 했다) 의사로 마을에 큰 도움이 된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이야말로 저주와도 같은 병을 퍼뜨린 장본인일지도 모른다면서 그를 매도했다. 뭐든 다 고치는 사람이 지금 마을을 죽여가는 병은 고치지도 못하고 환자도 봐주지 않는다면 이게 다른 의도가 아니고 뭐냐는 거였다. 전자는 흔쾌히 미엘레에게 의사의 집이 어디인지 알려주었고, 후자는 미엘레를 말렸지만 그가 의견을 굽히지 않자 그러다 잘못 되어도 자기는 모른다고 윽박지르고는 떠나갔다.
그래서 문득 찻잔을 들었을 때 나는 향기에 이질적인 구석은 없나 생각하게 된 것이다. 실례인 걸 알기에 그만뒀지만 적어도 차를 마시는 순간에 목을 타고 넘어가는 온도에는 불안이 섞여 있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응. 손님은?"
"응접실에 계십니다."
따뜻한 차를 마시느라 풀어졌던 온몸의 감각이 일시에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미엘레는 찻잔을 내려놓고 복도 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정말 화타건, 아니면 아주 무서운 사람이건 한 눈에 봐서 알아볼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자연스레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 나는 내 증상을 해결하러 온 거야. 꿈을 꾸는 것. 그래서 잠들지 못하는 것. 이 마을에 도는 병만 아니면 그는 뭐든 살펴봐준다고 했다. 뭐든.
짙은 검은색의 망토를 두르고 있던 여주인은 천천히 옷깃을 젖히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와요."
"안……."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던 미엘레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버린 손님을 바라보는 주인의 눈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노을과 보석을 닮은 붉은 눈, 망토 아래까지 길게 늘어지는 검은색 긴 머리카락. 멀리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느꼈던 기시감을 부정하던 마음. 그것들이 한 데 모여서 섞이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깨지는 기분이 들었다.
카나.
미엘레는 말해놓고도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제 목소리이며 자신의 입술과 혀를 움직여 소리를 냈는데, 그러고자 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더욱이 믿겨지지 않은 건 그의 외마디를 들은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을 들은 것처럼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웃었다.
제 이름을 알고 계시네요.
높다란 꿈의 기둥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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