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작 고딕호러
- 2021년 10월 30일
- 15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31일

저택의 하루는 일찍 시작한다.
예민한 주인 때문에 집 안까지 드나드는 걸 허락받은 사람이 거의 없는 탓도 있지만, 본디 그가 잠이 많은 편이 아닌 것도 이유일 것이다. 저택의 집사, 혹은 유일한 사용인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을 터인 애런 크레이튼은 규칙적으로 밤 12시, 뻐꾸기가 울기 시작하면 저택의 모든 문이 잠겨져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순찰을 시작했고 12시 반에 정확히 제게 주어진 방으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새벽 4시 반이 되는 순간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밤 사이에 주인이 설렁줄을 당겨 그를 부르기라도 한다면 그의 수면 시간은 아마 더 짧아졌을 것이나 저택과 그를 지배하는 아가씨는 2년간 단 한 번도 그를 깨운 적이 없었다.
해가 가장 긴 하짓날 근처여도 4시 반은 여전히 어둡다. 자리에서 일어난 애런은 우선 복도를 가로지르며 보이는 모든 창문의 커튼을 치는 것부터 일과를 시작한다. 1층, 2층, 3층, 4층을 차례대로 확인하고 침입자가 들어온 것은 아닌가 확인을 끝내면, 그는 밤새 맺힌 이슬로부터 옷을 보호하기 위해 양초를 발라 방수 처리를 한 두꺼운 천으로 된 망토로 꼼꼼히 몸을 싸매고 두 번째 일과를 시작한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헤매거나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신경을 써 시간이 길어질 때도 있었으나 이제 이 저택을 제 몸처럼 알고 있는 그에게는 20분이면 충분하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것은 날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몇 년간 손질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자란 나무와 풀들이 우거져간 탓이다. 애런은 앨버스에게 몇 번 정원 손질을 하지 않아도 되냐고 물었었으나, 그의 주인은 대답하지 않고 차만 홀짝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나, 애런은 허락받지 않으면 무언가를 하지 않았으므로 정원은 그렇게 방해받지 않고 제멋대로 자라날 수 있었다. 저택의 외관은 이제 나무가 적게 심어진 오른쪽 담 부근이 아니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저택의 담장을 뒤덮고 있는 장미 나무가 무성해지다 못해 검게 보이는 수준에 달해 밖에서 이 저택을 ‘검은 장미의 저택’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길 정도는 편하게 오갈 수 있게 가지치기를 해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애런은 무표정하게 제 얼굴 앞을 가로막던 나뭇가지를 위로 들어 올렸다. 나무는 크게 흔들렸고, 아래에 있던 애런에게 물방울들을 우수수 떨궜다. 애런은 망토의 모자 위에 물방울들이 후두둑 떨궈지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바다 근처도 아닌데 저택에는 유독 물안개가 짙게 끼곤 했다. 빗길을 걸은 것처럼 옷이 흠뻑 젖는 경험은 처음 몇 번으로 충분했다. 모자 그림자가 짙게 깔린 그늘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그의 허리춤 근처까지 오는 나뭇가지들을 응시했다. 그에게는 큰 방해가 아니었으나, 그의 주인이 이 길을 통해 나가고 싶어진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앨버스는 인내심이 짧은 주인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미숙한 준비에도 눈감아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길을 쉽게 오가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댄다면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 가지치기에 도움이 될 도구를 본 적이 있는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그는 밤 내내 저택의 철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던 쇠사슬을 풀어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사슬은 아래로 떨어졌다. 애런은 허리를 굽혀 사슬을 주워 제 팔에 감았다. 어지간한 어린아이 하나는 족히 될 법한 무게였지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는 팔을 들어 올려, 그대로 문을 활짝 열었다. 사슬을 섬세하게 풀어내는 데에는 요령이 쌓여도 시간이 필요했다. 애런은 안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정확히 5시 5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서서 마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앨버스는 모시기에 그리 까다로운 주인은 아니었으나, 유독 한 가지 양보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음식이었다. 제 성에 차지 않는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식사를 물렸다. 애런은, 비록 그에게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제 입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으므로 앨버스가 만족할 정도의 성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애런이 집사로서 머무르게 된 지 3일째 되는 날, 앨버스는 우아하게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제 입을 닦았다. 한 입밖에 먹지 않은 음식을 그는 냅킨을 쥔 손 너머로 힐끔 바라보았다. 옆에서 고개를 반쯤 떨군 채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애런을 향해 그는 명령했다.
‘저것. 가서 태우세요.’
‘……예.’
‘그리고 내일부턴 주방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날부터 앨버스는 음식을 손수 조리했다. 본인을 위한, 섬세하게 심혈을 기울여 만든 화려한 정찬 외에도 애런이 먹을 적당한 요리까지 함께 준비해, 그를 몇 번 황송함과 죄송함 사이의 깊은 절벽을 오가게 했지만 어떤 만류에도 앨버스의 뜻은 굽혀지지 않았다. 아침 식사로 미리 만들어둔 빵을 데우는 정도나 차를 따르는 것 정도가 그에게 허락된 한계였다. 제가 준비한 완벽한 식재료를 망치는 것 역시 허락하지 않겠다는 앨버스의 말 앞에서 애런은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부엌은 앨버스의 영역이었다. 달에 한 번씩 있는 대청소의 날에도 애런에게 출입은 허락되지 않았다. 1층부터 4층까지의 모든 방은 그의 출입이 자유로웠고 심지어 앨버스의 침실마저 애런의 손길 하에 정리되었으나, 부엌만큼은 그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딱히 위생이 걱정되진 않았다. 앨버스라면 분명 부엌만큼은 무엇보다 더 확실하게 관리할 것을 애런 역시 알고 있었으니까.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빠르게 인정하고 받아들여,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고 순응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나 이 사실이 유독 오랜 시간 동안 그를 쫓아다니며 괴롭혀, 상념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아마도….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새조차 울지 않는 새벽에 불협화음이 섞인다. 애런은 생각을 멈추고 언덕의 끝을 바라보았다. 어두워서 보이는 게 거의 없다고 하나 소리만큼은 선명하게 잘 들렸다. 길이 잘 정비되지 않은 탓에 가끔 돌이 튀어 올라 마차 바퀴에 부딪히는 소리. 말발굽이 나지막하게 땅을 울리는 소리. 말이 숨을 내쉬고 마부가 가볍게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 애런은 저택 앞에 멈춰선 마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흑단으로 만든 것인지, 혹은 검게 칠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새까만 마차는 어둠에 익숙한 눈으로도 그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고삐를 가볍게 당기는 것만으로도 말들을 멈춰 세웠던 마부는 마차에서 내려 뒤에서 궤짝 세 개를 꺼냈다. 애런은 궤짝의 수를 한 번 더 세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큰 것 하나, 작은 것 둘. 앨버스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그는 마부에게 돈이 담겨있을 ─ 열어본 적은 없어 확신은 하지 못했다 ─ 자루와 함께 작은 쪽지를 건넸다. 마부는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자루를 다시 뒤에 실은 뒤 자리에 올라 채찍을 휘둘렀다. 말들은 가벼운 투레질을 한 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몇 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짐이 사라진 것이 훨 나은지, 올 때보다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그들은 떠났다.
음식의 기본은 신선한 식재료라고 앨버스는 말했고, 따라서 저택의 주방은 매일매일 식재료를 받아오는 방식으로 돌아갔다. 식료품을 실은 마차는 정확히 새벽 5시 10분에,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상관없이 저택의 앞에 도착했고, 전날 앨버스가 요구한 것들을 내려놓은 다음에 돈과 다음날 그가 준비해야 하는 식료품이 적힌 쪽지를 받아 들고 떠났다. 그가 저택에 오기 전부터 이러한 방식으로 돌아갔다고 했으므로 어떤 연결 고리를 통해 앨버스가 처음 그들과 접촉했는지 애런은 알 수 없었으나, 의문을 갖는 것은 그의 일이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는 묵묵히 제 몫의 일을 다하면 됐다. 애런은 쇠사슬을 감은 팔의 반대편으로 궤짝을 들어 올려 어깨에 짊어졌다. 평상시에는 하나나 둘 정도라 한 번에 갈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세 개의 궤짝이 와서 길을 한 번 더 돌아와야 했다.
받아온 궤짝을 부엌과 연결된 식료품 창고에 넣고, 전날 사용이 끝나 텅 빈 궤짝을 밖으로 옮기고 나면 그의 새벽 일과는 끝이 난다. 궤짝을 열어 내용물을 정리하는 것조차 앨버스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할 수 없었다. 앨버스가 일어나는 시간은 보통 8시 반 전후였으므로 아침 식사를 위한 차를 우리는 일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하는 데 쓸 시간을 제외한다면 2시간 반 정도가 비는 것이다. 물론, 집사로서 할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갔다. 저택은 넓었고 관리하는 사람은 고작 한 명에 불과했으니까. 애런은 보통 쇠사슬에 기름칠을 하거나, 1층을 쓸고 닦으며 시간을 보냈다. 밤 내내 이슬에 흠뻑 적셔진 쇠사슬은 매일 기름칠을 하지 않는다면 녹이 슬 것이다. 그나마 지금처럼 밤에만 내걸고 있으니 아직은 멀쩡했으나, 언제 철의 매끈한 감촉 사이에 거친 녹이 자리 잡아 문을 열지 못하게 막아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때때로 그를 사로잡았다. 기름을 듬뿍 머금은 천으로 사슬의 사이사이를 확실하게 닦은 뒤, 애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1층의 유리창을 닦을 예정이었다. 해가 뜬 후에는 어떠한 이유로도 커튼을 걷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유리창의 얼룩을 강하게 문질러 닦던 애런은 아무리 힘을 주어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밖에서 생긴 얼룩인 듯하니, 해가 진 이후에 문을 열고 닦아야 할 것으로 보였다. 그는 창문 밖을 잠시 멍하니 내다보다가, 시선을 저택의 문 부근으로 돌렸다. 문은 잠금장치가 없어, 그가 아니면 푸를 수 없는 무게의 사슬을 철문의 창살 사이로 빙빙 돌려 감는 방식으로 잠가두곤 했다. 그마저도 그가 잠자리에 드는 밤의 일이고, 낮에는 손님이 올 수도 있다면서 앨버스는 문을 잠그지 말라고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듯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어차피 네가 있는데 도둑이 들어와도 문제될 것은 없다면서. 2년이 지난 오늘까지 손님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한 명도 없었지만 말이다.
처음에, 애런은 저택이 외딴 지역에 위치해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앨버스의 지위나 신분이 고귀해 사람들이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은.
1층 현관의 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괘종시계가 종을 울렸다. 애런은 고개를 퍼뜩 치켜 올리며 몸을 돌렸다. 저택에는 시계가 딱 세 개 존재했다. 애런에게 주어진 회중시계. 앨버스의 침실 탁자 위에 놓인 도자기로 만든 우아한 자명종. 그리고 현관의 괘종시계가 그것이었다. 그러나 셋 중 어떤 것도 온전하지 않았다. 애런이 오기 전까지 창고에서 방치되었다는 회중시계는 새까맣게 변색한 지 오래라 빛을 받아도 반짝이지 못했으며 뚜껑도 힘을 주어야 겨우 열 수 있었고, 앨버스의 자명종은 정해진 시간에 등장해 춤춰야 하는 도자기 인형들이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아가는 대신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판의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거닐었다. 괘종시계는 흔히 알려진 대로 정각이 아니라 매 시 30분에 종을 울렸다. 따라서 지금은 7시 30분. 슬슬 앨버스의 아침 채비를 도울 준비를 해야 했다.
애런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앨버스가 일어나면 차와 함께 간단한 요깃거리를 쟁반에 받쳐 들고 가고, 그가 부엌으로 내려가면 3층을 마저 정비해야 했다. 어제 서재의 먼지를 털었으므로 오늘은 책장을 닦는 것이 괜찮아 보였다. 4층 바닥에 니스칠을 새로 할 때도 되었으니 그것도 하는 게 좋겠고. 그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며 하루에 일과를 빠듯하게 채워 넣었다. 실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앨버스는 제 방이 있는 3층과 1층의 부엌, 다이닝 룸만을 오갔다. 응접실이나 손님방 등 최소한으로 관리해야 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들은 몇 달간 가만히 내버려 둔다고 해서 혼을 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애런에겐 무언가 할 것이 필요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반복적인 노동이라도 하는 것이 나았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 헛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니까.
그는 걸음을 잠시 멈췄다. 시선이 저택의 문 위에 올려진 십자가를 향했다. 예수가 가련하게 매달려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로마서6:8). 애런은 속으로 구절을 짧게 되뇌였다. 앨버스는 독실한 신자기도 했으므로, 성경과 그리스도, 성모를 나타내는 것들은 저택 내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죽지 않는다면? 죽음이 허락되지 않은 자에게, 그리스도의 안식과 천국은 열려 있는가?
애런은 그대로 숨을 멈췄다. 저택의 곳곳에 장미꽃 다발을 꽂아두고 말린 장미가 방마다 걸려있는 만큼 저택은 짙은 장미의 향에 절여져 있었으나, 그는 그 아래에 깔린 혈향을 때때로 느꼈다. 사람들이 이 저택을 부르는 이름에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Manoir des Vampires.
그와 이 저택을 지배하는 주인은 와인이 아닌 피를 마시고, 장미 덤불 아래에 시체를 묻는 흡혈귀였다.
앨버스의 방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애런은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자 발을 정확하게 두 걸음 움직여 그의 문 앞에 섰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짧게 하고, 한 손을 허리 뒤에 올린 채로 꼿꼿하게 허리를 펴 문에 두 번 노크했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답이 돌아왔다.
“들어오세요.”
앨버스는 침대 위에 앉아 베개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묵직한 커튼이 창문을 전부 가리고 있어 빛이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은 방은 어두컴컴했다. 그는 한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침대 옆의 탁자로 다가가 안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냈다. 상자의 겉면이 긁히는 불협화음이 방 안의 침묵을 깨트렸다. 애런의 손안에서 피어난 불꽃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는 숨을 참은 채로 양초에 불을 붙였다. 제대로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한 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창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앨버스가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촛불은 분명 따스한 색인데도, 그 빛을 반사하고 있는 그의 붉은 눈동자는 보석처럼 빛났다. 무기질적인, 아름다운, 그리고 차가운 시선이었다. 애런은 말없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좋은 아침입니다, 앨버스.”
빛줄기 하나도 허락하지 않는 방에 불이 들어오며 주인의 하루가 시작된다.
점심 식탁에 올라온 메뉴는 사슴고기 스테이크였다. 앨버스답지 않은 메뉴 선택이었다. 그는 영국인답게 규칙적이고 확실한 생활 습관을 보유하고 있었고, 언제 무엇을 먹는 지야말로 가장 중요한 규칙 중 하나였다. 아침은 가볍게, 샌드위치류를 선호하지만, 그날의 기호에 따라 샐러드도 괜찮다. 간이 강하게 되지 않은 것이 중요했다. 점심은 아침처럼 가벼운 메뉴는 아니어도 오후 3시에 있을 티타임을 고려해서 적당한 메뉴가 선정되었고, 육류나 생선이 메인으로 들어간다면 저녁의 경우였다. 애런은 식기를 집어 들고 잠시 제 접시 위에 올려진 고깃덩이를 응시했다. 각도를 정확하게 지키며 제 몫의 스테이크를 썰던 앨버스가 입을 열었다.
“메뉴에 불만이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애런은 묵묵히 앨버스를 따라 스테이크 위에 나이프를 올렸다. 겉은 까맣게 익어 있었으나, 앨버스의 접시 위를 봤을 때 아마 속은 레어에 가까울 것으로 보였다. 은빛 식기가 다이닝 홀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에서 나온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칼등을 누르고 있는 손에 가볍게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고기는 부드럽게 썰렸다. 질이 좋은 고기다. 칼 아래에 아직 붉은 속살이 드러나고, 그 사이로 육즙보다 더 짙은 빛깔의 붉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의 손 끝에 힘이 더 들어갔다.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혀 소음을 일으키기 전에 앨버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요구한 와인이 제대로 들어와서, 와인을 베이스로 한 소스를 만들어서 끼얹어 보았답니다.”
그는 우아하게 옆에 둔 와인잔을 들어 올렸다. 애런은 숨이 막히는 기분을 내리누르며 고개를 들어 앨버스가 들고 있는 잔을 응시했다. 잔 안의 음료는 투명했다. 앨버스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아직 낮이니, 부담스럽지 않은 게 낫겠죠. 올해 괜찮은 아이스와인이 나왔다고 해요.”
들어요, 애런. 애런은 무언가에 홀린 기분으로 포크를 들어 잘린 고기를 찍었다. 접시 위에 들린 고기조각 아래로 붉은 소스가 뚝뚝 흘러내려 점점이 무늬를 만들어냈다. 입에 고기를 넣는 순간까지도 그는 어딘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앨버스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턱이 움직이고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와인잔의 곡률로도 붉은 시선은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할, 어떠한 존재도 해칠 수 없어 보이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앨버스가 웃는다.
“맛은 있나요, 애런?”
“예. 맛있습니다.”
목이 졸리는 기분으로 그는 답했다. 앨버스의 음식은 항상 맛있었다. 소화에 무리가 없고 영양이 있기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에게도 미각이란 것이 존재는 했으므로, 처음 그의 음식을 맛본 순간부터 그 사실은 변함없는 명제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같은 대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앨버스는 마치 다른 대답을 원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매번 그를 식탁의 반대편에 앉혀두고 같은 질문을 했다. 앨버스는 잠시 동안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흥미를 잃은 얼굴로 다시 시선을 내려 제 식사를 계속했다. 애런은 그제야 제 접시 위에 가니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직 고기, 그리고 붉은 소스뿐이었다.
식사는 조용히 이어졌다. 앨버스가 더는 말을 걸지 않았고 무언가 생각에 잠겼으며, 애런은 그런 주인의 생각을 방해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자가 아니었다. 혹은, 용감하지 않았거나.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에서야 그는 앨버스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저, 앨버스.”
“…무슨 일인가요?”
생각에 잠겨있던 탓에 앨버스의 대답은 반 박자 정도 느렸다. 애런은 시선을 잠시 앨버스의 얼굴에서부터 아래로 내렸다.
“괜찮으시다면, 저택의 대문으로 향하는 길의 옆에 심어진 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할까 합니다. 오가는 데 방해가 될 정도로 나무들이 자라서….”
“아, 나무들. 벌써 그렇게 되었던가요.”
여상한 말투로 답하고는 고개를 끄덕인 앨버스가 입을 열었다.
“그러도록 해요. 걸어 다니는 데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애런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냅킨으로 입가를 닦던 앨버스는 아, 하고 무언가가 생각난 듯 뒷말을 이었다.
“정원용 가위가 필요하겠네요. 트레이 운반이 끝나면 돌아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접시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던 애런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앨버스를 잠시 응시했다가,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앨버스가 냅킨을 내려놓고 일어나서 등을 돌리고 나서야 애런은 눈을 뜰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가 알기로는 집안의 어떤 창고에도 정원용 가위는 없었다. 그가 모르고 앨버스가 아는 곳이라면 저택에서는 단 하나, 부엌 외에는 없다.
그러나 어떤 천치가 부엌에 정원용 가위를 보관한단 말인가.
앨버스가 건넨 가위는 날이 잘 관리되어 있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손질한다면 말끔해질 것으로 보였다. 애런은 복도에 서서 가위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위로 높이 들어 불빛에 비춰보았다. 가스등의 불빛 아래 둔탁한 날을 노려보던 애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식료품 창고는 건조하고 서늘한 것이 기본이다. 날에는 딱히 녹이 슬지 않았지만, 가위의 이음매 부분에는 조금 붉은 녹이 얼핏 비쳤다. 창고에 있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부엌에 이런 것을 둘 곳이 있었던가?
딱히 저택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인이 설령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은 설령 그가 인간의 생명을 갈취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앨버스를 배신하거나 그의 명을 어기는 일, 이 저택에서 도망치거나 혹은─ 그의 심장에 서늘한 말뚝을 박아넣는 일을 그가 감히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또는,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설령 지금 여기에서 앨버스가 그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도, 산 채로 가슴을 갈라 그 안에서 뛰고 있는 심장을 보이라고 명령을 해도 그는 따를 것이다. 비이성적인 맹목, 주인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바치는 충성이야말로 그를 이루는 근본이니까. 어째서 그런지는 그 역시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애런 역시 자신이 제대로 된 사고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억을 잃고 낯선 저택에서 깨어났을 때 이 저택에 계속 머무른다는 선택지를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갈 곳이 없다고 해도 그처럼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면 막노동을 해서라도 먹고 지낼 수 있었을 테고, 자신의 상태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이지 평범한 상식을 다 잊은 것도 아니었다. 어리고 고귀한 아가씨, 그것도 홀로 있는 사람의 옆에 자신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은 추문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아무리 앨버스가 저택에 남아도 된다고 했어도, 그가 제정신이라면 은혜를 언젠간 갚겠다는 말과 함께 떠났어야 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홀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무엇보다 깊은 공포에 빠져 어쩔 줄을 모르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기억을 잃었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애런은, 비록 확신할 수는 없으나, 그가, 그의 몸이 쉽게 세상을 살아오기만 하진 않았음을 금방 깨달았다. 그것은 평균보다 강한 근력이라든가, 그리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는 무기들이라든가, 부드러운 음식이 오히려 거칠게 느껴지는 혀라든가에서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 삶이었을 것이다. 지금과 같은 저택의 집사라는 위치 역시, 원래의 그라면 닿을 수 없는 위치였을 테다. 그러니 그는 굳이 기억을 되찾아야겠다는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공격당해서 쓰러진 거라면 모를까, 앨버스는 그를 발견했을 때 외상을 찾지 못했다고 했고 깨어난 뒤에도 불편한 곳은 없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조금 걸렸으나, 기억이 없다고 해서 그에게 큰 불편이 되지는 않을 것을 애런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혼자 남겨진 그에게 어떠한 목적의식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만한,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최소한의 생각. 애런에게는 그것이 부재했다.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순적인 점은 그러면서도 그가 죽고 싶어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면서 죽으려는 생각도 없다니, 우습기 그지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자에게, 자신을 위해 살아달라는 말이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지는 충분히 짐작해볼 만하다.
애런 크레이튼을 둘러싼 수많은 비극은 대부분 위와 같은 이유로 일어난다. 그는 살아갈 이유를 갖지 못하면서 生과 死 중에서는 삶을 택하고 싶어하는 사람이고, 명령이라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는 주제에 생명을 해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으며,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하나 누군가를 숭배하듯 모심으로써 살아간다. 이번 역시 그렇다. 그의 주인이 흡혈귀라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애런 크레이튼은 또다시 알량한 감정에 휩쓸리고 만다. 어쩌면 앨버스가 먹고 마시는 것이 인육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루하루 숨 쉬고 있는 바탕에 누군가의 절망과 비명이 깔렸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진실을 안 뒤에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으면서, 눈을 감고 모르는 척하기에는 차마 도망칠 용기가 없다.
그는 가위를 탁자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낮게 가라앉은 시선이 가위의 날을 한 번 더 응시했다. 숨을 두어 번 깊게 뱉으며 애런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딱 한 번만, 가볍게 둘러보고 나오는 거라고. 앨버스는 제 방에 있다. 1층의 부엌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것 정도는 들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비극은 이미 시작된 지 오래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부엌은 평범했다.
애런이 기억하는 바와 ─ 제법 긴 시간이 흘렀고 그 자신도 본인의 기억력을 좋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가 오기 전까지도 앨버스가 관리하던 곳이었고, 애런이 맡았던 것은 고작 이틀에 불과하니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의 변덕스러운 주인이 정말로 아끼는 것은 그대로 보존하고자 하는 편임을 알았다. 이 저택에서 앨버스가 가장 많이 애착을 가진 장소는 그의 방보다도 주방일 테니, 그는 3년이 아닌 5년간 이 주방의 배치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이곳은 아니다. 애런은 결론을 금방 내리고는 부엌을 돌아보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렇다면 어디에? 그가 아직 잘 모르는 또 다른 공간이 있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반쯤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곰팡이 하나 없이 깔끔한 무늬가 그를 마주했다. 3년 전에도 그랬었다. 환기가 잘 안 되는, 자그마한 창 두어 개만 있는 곳인데도 이곳은 유독 서늘하고 건조했다는 인상을 남겨주었었다. 그때는 단지 설계를 잘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철제 보울을 떨어트렸다. 두어 번 바닥 타일에 부딪혀 튕기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던 그릇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멈췄다. 애런은 무표정하게 떨어진 그릇에 다가가서 허리를 숙여 집어 올렸다. 소리가 달랐다. 처음에는 좀 더 맑은, 그리고 마지막에는 둔탁한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달랐으나 그렇다는 건…….
애런은 시선을 창고로 향하는 문을 향해 던졌다.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다음으로는 후회를 가정한다는 것은 이미 그가 실행할 것임을 알아서라는 생각이 뒤따랐다.
창고 구석에 숨겨진 문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겠지만, 예전에 문 앞을 가로막고 있어 그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궤짝들이 죄다 치워져 있는 덕분이었다. 사다리를 생각했으나 나타난 것은 견고한 돌계단이었다. 애런은 성냥을 그어 촛불에 불을 붙이며 그것이 더 ‘앨버스답다’는 것에 동의했다. 은은한 불빛이 좁은 통로를 가득 채웠다. 계단은 관리가 잘 된 모양이었다. 이끼가 끼거나 흔들리는 돌은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던 애런은 물소리에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촛불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 너머로 희미하게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습기, 고이지 않은, 그러나 소리로 짐작해 봤을 때 그리 양이 많진 않을…. 어렵지 않게 추리해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애런은 속으로 스스로에 대한 비소를 내뱉었다.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걸 보면 어디 뒷골목에서 단순히 굴러먹기만 하던 놈이 아니라 건달 대장 정도는 해봤던 걸까. 좋은 위치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비하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계단이 끝난 뒤에도 좁은 복도가 이어졌다. 애런은 촛불을 가슴께에 놓고 앞을 응시하며 걸어갔다. 불빛이 있는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의아하던 차에 빛을 받아 반사되는 천의 광택을 보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터운 천으로 된 커튼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천을 걷자 그곳엔….
무엇을 기대했을까? 피가 가득한 분수? 산처럼 쌓인 관? 굴러다니는 뼈다귀와 시체의 손가락들?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드러난 공간은 넓었으나, 텅 비어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발을 내디딘 애런은 그 공간이 성당의 예배실을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체적인 구조와 길게 늘어진 공간 사이를 가로지르는 돌길. 물줄기는 이 방을 전체적으로 휘감으며 흘러가는 모양이거나 바닥 아래를 지나가는 건지 육안으로는 흐르는 물이 보이지 않았다. 줄을 맞춰 길의 양옆으로는 촛불이 늘어져 있었다. 애런은 제가 가져온 촛불을 불어서 끄곤, 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방의 중심보다 조금 더 위, 길이 안내하는 곳, 예배당에서 교단이 위치한 장소를 향해.
방의 유일한 가구가 하나 거기에 존재했다. 그의 키보다 거대한 것을 보아 2m는 넘는 높이의 무언가를 흰색 천이 덮고 있었다. 애런은 천을 향해 손을 뻗었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않았어도 천을 걷어봤을 것이다.
“늘 궁금했어요.”
애런의 손이 멈췄다.
“어째서 당신은 결국 다시 여기로 돌아오고야 마는 걸까? 신기하지 않나요? 이것은 나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배신이 아니에요. 당신이 차라리 다른 뜻을 품은 거였다면 마음은 편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 순간에도 여전히.”
언제 그의 곁에 다가왔는지도 모를 자그마한 인영이 애런의 옆에 나란히 섰다. 앨버스는 그를 올려다보지 않고 따라 손을 뻗어 애런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큰 손과 작은 손, 검은 손과 하얀 손, 피로 물든 손과….
“나는 당신의 충성을 의심하진 않는군요.”
재밌지 않나요? 풍성한 속눈썹이 앨버스가 눈썹을 깜빡거릴 때마다 자연스럽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앨버스는 고개를 들어 애런을 응시했다. 그는 목이 졸린 것만 같은 기분으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앨버스.”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분명한 흥미를 담고 부드럽게 휘어졌다. 애런은 그 시선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동시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이 그가 원하지 않는데도 벌어졌다. 한 편의 연극 같았다. 그의 의사가 배제된, 정해진 대사를 내뱉어야 하는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만약 그에게 자유 의지가 주어졌다면 다른 질문을 했었을지도 모른다. 못 본 척할 수는 없겠습니까 라던가, 나를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라던가. 가능성은 다양했다.
하지만 신은 그에게 다른 배역을 안배해둔 모양이었다. 애런은 제 목소리가 석조 벽에 부딪혀서 울리는 것을 타인의 말을 듣는 기분으로 받아들였다.
“당신은 흡혈귀입니까?”
앨버스는, 지극히 상냥하고 우아하며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띤 채로 대꾸했다.
“직접 확인해보는 건 어떤가요?”
그리고 그는 애런이 말릴 틈새도 없이 천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천 아래에 있던 것은 거울이었다. 신경 써서 관리한 듯 표면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아, 애런은 드디어 어째서 앨버스가 요리를 하지 않는 시간에도 주방에 들어가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지 이해했다. 이렇게 큰 거울을 매일같이 닦으며 관리하려면 시간이 제법 들었을 것이다. 황동이라 하기에는 불빛 아래에서 더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보아 틀 위의 장식은 금일 테다. 그의 이성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 정보들을 쉴 새 없이 뱉어내다가, 이윽고 포기했다. 애런은 손에 들고 있던 촛대를 떨궜다. 그대로 바닥을 타고 굴러가던 초의 끝이 거울에 닿았다. 앨버스가 옆에서 웃었다. 거울 속에서 홀로, 그만이 웃고 있었다.
“어쩌면 본능일지도 몰라요. 그야 당신, 슬슬 목마를 때가 되었고… 저도 좋은 주인답게, 적절한 먹이를 주고 싶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혀를 갖고서도 유독 피에만 민감하니까, 너무 많이 섞으면 들통나버린단 말이죠.”
자아, 식사시간이에요. 앨버스는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제 목에 묶인 리본을 풀었다. 붉은 공단 리본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자 흰 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점 하나 없는 하얀 살곁 위의 상처 두 개. 벌레가 문 것이라기엔 크고, 무기에 찔렸다기에는 작은.
“그러면 지금이라도─ 맛있게 먹어요, 애런.”
애런은 멍한 얼굴로 손을 마주 뻗었다. 사르르 웃으며 눈을 감고 고개를 옆으로 떨궈 목덜미를 드러낸 앨버스가 재촉하듯 그의 고개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랬나. 그랬던 건가. 깨달음보다도 앞서는 것은 본능이었다. 앨버스의 말대로, 여태까지 어떻게 감추고 있었는지 모를 본능이 그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고. 그러니 눈앞에 있는 자의 피를 남김없이 마시고 살을 씹어 삼키자고. 그런 성난 본능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앨버스가 그의 목덜미를 한 번 다독였다. 착하게 굴어야죠? 그 말에 순식간에 온순해지며, 애런은 입을 크게 벌렸다.

“…조금은 번거롭네요.”
앨버스는 바닥에 쓰러진 애런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보다 주기가 빨라지고 있었다. 어쩌면 다음에는 다른 장소에서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곤란했다. 피가 묻은 옷을 적당히 둘러대는 것도 번거로웠으니까.
그는 품 안에 손을 넣어 시계를 하나 꺼냈다. 은빛으로 빛나는 시계의 뚜껑에는 붉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시간은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때마침 위에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메아리쳤다. 하나, 둘, 셋.
“태엽을 고쳤다고 다시 말하는 게 좋으려나?”
귀찮은 사용인이었다. 그럴 만한 가치는 있었지만. 앨버스는 손끝으로 애런의 턱선을 따라 조심스레 훑었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꾸준한 관심이 필요했으나, 지루하지 않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합격이었다. 좋은 꿈 꿔요, 애런. 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세계는 돌아간다.
거울에는 원래대로 천이 덮이고, 30분이 빠른 세계에서 집사는 눈이 가려진 채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저택의 하루는 다시, 변하지 않고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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