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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 합작 고딕호러
    합작 고딕호러
  • 2021년 10월 30일
  • 18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31일










이 시기의 저택, 아니 이 지역은 비는커녕 구름 한 점 보기 힘들어요. 해가 내리쬐는 게 너무 무더워서 모두가 얇은 유니폼을 입고 저택의 그늘로만 지나다니죠. 원래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일주일 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차가운 비에 모두가 좋아했어요. 뜨거움을 식혀줄 비를 누가 마다하겠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멈추지 않는 걸 보고 저와 사라, 이곳의 일꾼들은 모두 입 모아 말했죠.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요.


그리고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저택 아래에 있는 마을로 내려가지 못하게 됐을 때, 우리 모두 불안에 떨었어요. 하필 이 저택은 절벽 꼭대기에 존재했고, 마을에 가지 못한다면 밀가루 한 포대도 구하지 못하니까요.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비 때문에 절벽이 똑……. 말하지 않아도 뒤의 내용은 아시겠죠?


총 집사님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정리하려고 하셨어요. 굳어있는 표정을 정리하고 단정한 행색으로 주인님께 현 상황을 보고했죠, 식료품이 얼마 남았고, 어떻게 해서든 마을로 내려갈 준비를 해보겠다고 말이에요. 주인님은 집사님의 말을 듣고도 심드렁한 얼굴로 말씀하셨어요.


“식료품은 아직 넉넉하군. 이 날씨에 무리해서 마을로 갈 필요는 없겠어. 그만 쉬도록 해.”


관대한 처사에 그곳에 있던 집사님과 저, 사라는 놀라서 주인님을 흘끗 바라봤어요. 시선을 느끼셨을 텐데도 주인님은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을 한 장씩 넘기고 계셨죠. 본래라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식료품이 얼마 남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셨을 분이 말이에요!


이런, 당신 우리 주인님을 모르시는군요? 하긴, 절벽 꼭대기 저택의 주인은 소문만 무성하지 진실을 아는 사람은 적으니까요.


우리 주인님은 제이슨 퀸, 이 저택의 유일한 주인이시죠. 몇 해 전에 이 저택을 구매하시고 저희를 직접 고용하셨답니다. 무더운 날씨가 찾아오기 전에 저택에 머무르시다가 싸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떠나시고는 해요. 맞아요. 이곳은 주인님의 별장이에요. 겨울에는 안 오시냐고요? 절벽에서 겨울을 보내는 귀족이 어디 있겠어요! 추워서 모두가 꺼릴 텐데.


이곳의 사용인들은 모두 주인님을 좋아해요. 왜냐하면 주인님은 공과 사를 구별하시는 걸 누구보다 잘하시니까요. 큰 잘못만 하지 않는다면 주인님은 사용인을 쉽게 내치지 않으세요. 물론 가끔은 엄격하실 때도 있어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는 월급을 깎으시기는 하지만……. 아이코, 이 이야기는 주인님께 비밀로 해주세요.


하여튼, 주인님께서는 비가 내리는 내내 책만 읽으셨어요. 이미 이 저택에 있는 책을 다 읽으신 분이 말이에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 독서를 하시는 거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고 그러신 거다, 다들 온갖 추측을 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닌 걸 저와 사라는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저희는 주인님의 전담 하녀이고, 주인님이 이 저택에 오셨을 때마다 곁을 지켰으니까요. 이 저택에서 저희보다 주인님을 오래 본 사람은 없을걸요?


주인님은 책에서 무언가를 찾고 계셨어요. 가져오신 책들은 주로 신비한 것들, 혹은 사람들이 허구의 것이라 여기는 그런 내용이 가득했지만 분명 무엇을 찾고 계셨다고요. 책을 한 장씩 넘기는 주인님은 정말 절박해 보였어요. 사형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라던가, 사막 속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사람이 떠오를 정도로……. 그런 사람은 직접 봤냐고요? 에이, 당연히 비유죠.


주인님은 책 한 권을 다 읽으실 때마다 시계와 창밖을 확인하셨어요. 가끔은 저와 사라에게 비가 내린 지 며칠이 되었냐고 묻기도 하셨죠. 저희는 뒤에서 담요를 들고 있거나 주인님께서 다 읽으신 책을 정리하다 말고 공손히 말했어요. 비가 내린 지 사흘이 됐습니다. 나흘이, 닷새가……. 그렇게 꼬박 일주일이 되었을 때, 주인님은 읽고 있던 42번째 책을 내려놓으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어요. 그리고 저와 사라에게 말씀하셨죠.


“손님이 왔군. 수건을 들고 나를 따라와.”


뜬금없는 말이었어요. 그때는 밤 11시였고, 바깥은 여전히 비가 내려서 사람 한 명 돌아다니기 힘들어 보였어요. 절벽 주변에 짐승이 살지 않는다고 하지만, 잘못하면 낙사해 죽을 텐데 누가 밖을 돌아다니겠어요?


그리고 정말 소름 돋는 사실은 따로 있어요. 지금 주인님이 계신 방은 저택 내의 가장 안쪽의 방이라 정문이 보이지 않아요. 보이는 건 오로지 비가 내리는 하늘과 파도가 치는 바다뿐이라고요.


주인님께서 장난을 치시는 성격은 아니니 분명 진실일 텐데……. 저와 사라는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수건을 들고 주인님의 뒤를 쫓았어요. 주인님은 거침없이 복도를 가로지르셨어요. 처음에는 분명 걷듯 느리셨는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조금씩 빨라지더니 종내에는 뜀박질하듯 나아가셔서 저랑 사라도 치마가 휘날리도록 따라갔죠. 그렇게 다급해 보이는 주인님은 이 저택에서 일하고 처음 봤어요.


계단 역시 정신없이 내려가 1층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모두 소리를 들었어요. 똑똑, 똑, 똑똑……. 손가락 두 개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죠. 빗소리와 비슷했나? 그것보다는 조금 컸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길게 이어지던 노크는 곧 두드림으로 변했어요.


쾅, 쾅, 쾅! 이제는 주먹으로 내리치는 난폭한 울림이 저택을 채웠고, 두드림에 맞춰 문이 덜컥거렸죠. 당장이라도 부서질 거 같은 문을 보며 모두가 마른 침을 삼켰어요. 저 문 바깥에 무엇이 있을지 그 누구도 몰랐으니까요. 저는 주인님이 말씀하신 손님이 어쩌면 저 밑에서 먹이를 구하지 못해 절벽 끝까지 올라온 짐승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혹은……. 배고픔을 못 이겨 인간을 잡아먹으러 온 괴물.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바깥에 있는 괴물이 우리 모두를 잡아먹을 거고, 우리는 모두 시체가 되어서 이 저택의 바닥에 널브러질 거 같다는 그런 생각이 말이에요. 그 생각을 하자마자 눈앞이 검게 변했다가 하얗게 변했어요. 동시에 발아래에 붉은 웅덩이가 넓게 퍼지고, 누군가 그 뒤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식은땀이 온몸을 타고 흘렀고, 저는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입을 막았어요. 그리고 그 앞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해요. 금방 부서질 거 같은 문이 다시 눈에 들어왔거든요. 어쩌면 그 자리에 있던 몇 명은 저와 비슷한 풍경을 봤을지도 몰라요.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아, 문이 두드려지는 상황이었죠.


그래요. 문은 여전히 덜컹거렸고, 바깥의 무언가는 문을 부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사이 두려움이 전염됐는지 하인 몇 명은 무기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고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집사님도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오셨죠. 모두가 혼란스러운 그때에 주인님이 손을 휘저으셨어요. 자신이 나서겠다는 표시로요.


우리는 모두 주인님을 말리려고 했어요. 주인님은 건장한 남자이시긴 하지만, 승마 정도만 하셨거든요. 운동을 그렇게 챙겨하지 않으시니 저 바깥의 것에서 한주먹도 되지 않을 게 뻔해 보였죠. 주인님도 알고 계셨을 거예요. 자신의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요. 하지만 주인님은 무엇이 그리도 급하신지, 사용인들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문을 여셨죠. 아주 활짝.


분명 비가 내리기 전에 기름칠했었는데 문은 귀가 아픈 소리를 내며 열렸어요. 3개월 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았을 때도 아주 약간의 소리가 났는데, 희한하죠?


열린 문틈으로 비바람이 몰아쳤어요. 바다의 짠 냄새와 비린내가 코를 간지럽히고, 우리의 볼을 때렸죠. 날카로운 바람은 의문과 불안, 두려움을 뒤섞고 우리를 비웃는 것 같았어요. 뒤늦게 빗소리가 한층 더 크게 들리고, 저를 포함한 모두는 바깥에 시선을 주었죠.


문 바깥에는 괴물이 아닌, 한 남자가 있었어요. 키가 어찌나 크던지 주인님이 작아 보였어요. 고양이 앞에 선 쥐라고 할까요. 주인님께 이런 표현을 쓰기 싫지만, 딱 그 말이 떠올랐어요.


남자는 주인님을 한 번, 그리고 안쪽에 있는 우리를 한 번 보며 얼굴의 절반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어요. 물에 젖은 노란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자 모두가 숨을 멈췄어요. 저도 여태껏 가지고 있던 두려움은 잊고 남자를 바라보았죠.


남자는 무척 아름다웠어요. 파란색 눈은 하늘을 떠올리게 했고, 오뚝 선 코와 움푹 들어간 눈, 그리고 왼쪽 눈가에 있는 징그러운 흉터는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였죠. 그렇게 남자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사라에게 저에게 작게 속삭였어요.


“저 남자 눈가가 불에 그슬린 것 같네. 머리카락 끝도 이상하고.”


불에 그슬린 것? 저는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찬찬히 남자를 살폈고, 그제야 알아챘어요. 남자의 노란 머리카락은 끝으로 갈수록 붉다는 것을요. 멀리서 봤다면 피가 묻었을 거라 착각될 정도로 들쭉날쭉한 붉은 머리카락은……. 잠시 잊고 있던 두려움을 불러왔죠.


머리에서 수많은 생각이 날뛰었어요. 왜 그 남자가 이 저택에 도달한 건지, 매서운 비바람을 어떻게 헤치고 돌아다닌 건지, 얼굴의 흉터는 왜 생겼는지, 머리카락의 저건 혹시나……. 설마, 어쩌면 이런 단어가 꼬리를 물고 끝없이 늘어섰죠. 저만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에요. 들어보니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이 그 생각을 했대요. 어디서 들었냐고요? 당연히 식당에서 들었죠! 그 남자가 왔을 때부터 식당은 남자의 이야기로 언제나 시끌벅적하니까요.


하여튼, 저희가 두려움을 느끼는 사이 남자가 다시 주인님과 시선을 맞추었어요. 주인님은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팔짱을 끼고 남자를 봤어요. 그리고 남자에게 물었죠.


“길을 잃었나?”


주인님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저와 사라에게 손짓했어요. 저와 사라는 그제야 수건을 들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주인님의 뒤로 다가가 수건을 건네 드렸어요. 주인님은 그 수건을 펄럭이며 남자의 머리에 덮어씌우셨죠. 남자는 제 머리에 수건이 올라간 것이 당황스러운지 수건을 움켜쥐고는 겨우 입을 열었어요.


“어떻게 그걸…….”

“행색을 보면 알 수 있지.”


주인님은 또다시 남자의 말을 끊어내고, 그의 팔뚝을 잡고 끌어당겼어요. 남자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고, 열려있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죠. 그 누구도 문을 닫지 않았지만, 그날은 바람이 강했으니까요. 분명 바람이 닫아준 게 틀림없어요.


하여튼 주인님께서 남자를 직접 끌어들이셨으니 남자는 불청객이 아닌 손님이었어요. 저택에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 말이죠. 저희는 얼굴에 서려 있던 두려움을 지워내고 공손한 자세를 취한 채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어요.


“비가 내릴 동안 재워주지, 따라오도록.”

“……고맙습니다.”


남자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느리게 감사를 전했죠. 주인님은 그런 남자를 데리고 계단을 오르셨어요. 저와 사라는 소리 없이 그 뒤를 따랐고요.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느린 걸음으로 나아갔어요. 주인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남자가 그러고 있으니 답답했지만……. 별수 있나요? 주인님 마음에 든 손님인데, 저희가 무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남자는 벽에 걸린 초상화 3개를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어요.


“좋은 저택이군요.”

“사용인들이 힘을 써준 덕분이지.”


자연스러운 칭찬에 저와 사라는 당황했어요. 주인님은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분이시지만, 이런 칭찬을 쉽게 해주시는 분은 아니었거든요. 그 외에는 시답지 않은 대화가 이어졌어요.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그런 대화였죠. 그런 대화가 잔뜩 이어지다가 남자가 한 초상화 앞에서 우뚝 서버렸어요.


7년 전, 주인님이 이 저택에 처음 오셨을 때 그린 초상화였죠. 초상화 속 허리를 곧게 세운 주인님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 같았어요. 평소에도 그 초상화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신 거로 기억해요. 기회가 된다면 치우고 싶어 하셨는데, 어쩌다 보니 아직 그 자리에 있던 운 좋은 초상화였죠. 남자는 그 초상화를 하염없이 바라봤어요. 그리고 질문했죠.


“우리, 만난 적 있나요?”


정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어요. 주인님과 이 남자가 만난 적이 있을 리가요! 주인님은 이곳에 오시지 않을 때는 수도에서만 계신다고 들었거든요. 물론 그곳에서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문을 열었을 때, 주인님께서 이름을 부르셨겠죠. 제가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주인님은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답하셨어요.


“처음 만난 상대를 꾀는 건가? 재밌는 사람이군.”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남자는 당황스러운 모습으로 손사래를 쳤죠. 자기는 절대 그런 의도가 없었다면서요. 그렇지만 제가 듣기에도 영 그랬는걸요. 그리고 우리 주인님한테 무슨 망발이람! 그런 불만을 담아 남자를 조용히 노려보고 있을 때, 주인님의 시선이 저에게 닿았어요. 제가 노려볼 거란 사실을 아는 사람처럼! 저는 깜짝 놀라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엄숙한 사용인의 가면을 썼어요. 주인님의 시선은 제법 오래도록 저에게 머물러있었어요. 제가 무슨 사고라도 칠 거라 생각하셨나 봐요.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죠. 애초에 남자를 노려본 저의 잘못이니까요. 주인님은 언제나 남자를 끔찍하게 아꼈으니……. 곧 주인님은 시선을 거두셨어요.


“내 이름은 제이슨일세. 자네는?”

“나는 오토……. 아니 방금은 말실수였어, 제이슨.”

“듣기 좋군. 편하게 말하도록 해.”


저는 정말 놀라서 입술을 꾹 깨물었어요. 나긋한 어투로 아량을 베푸는 모습은 평생 보지 못했거든요. 더군다나 목소리가 꿀에 절인 레몬처럼 달콤해서 제 입이 달아진 기분이 들었어요. 사라도 저와 비슷했을 거예요. 주인님은 그런 저희를 신경 쓰지 않고 남자를 데리고 다시 저택을 걸으셨죠. 주인님은 앞장서 걸으면서도 남자의 시선이 닿았던 곳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그곳은 식료품 창고로 가는 길이다. 이 주일 정도의 식료품이 남아있지. 저쪽은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이고. 이쪽은 정원으로 나가는 길이지.”


등 뒤에 눈이 달린 사람이 우리 주인님이었다니! 총총걸음으로 따라가는 저희는 돌연 깨닫고 말았죠. 주인님이 남자를 주인님의 방으로 데려가고 있다는 사실을요! 아무리 손님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바로 주인님의 방으로 갈 수가 있죠? 응접실이나 하다못해 손님방이 있는데 말이에요! 저와 사라는 당장이라도 주인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저희는 주인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주인님은 남자가 자기 곁에 있길 원하고 계셨어요. 언제나 말이에요.


결국 남자는 방에 들어갔고, 저희는 집사님께 무어라 설명할지 고민하며 주인님의 명을 따랐어요. 남자의 몸이 차게 식었으니 욕조에 따듯한 물을 가득 받아놓으라 명하셨거든요. 손님이 주인님 방의 욕조를 쓴다니! 저희밖에 없어서 정말 다행인 일이었죠. 사용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면 뒤집어졌을 거예요. 그런 생각을 하며 사라와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어요. 욕조에 물을 채우는 동안, 문 너에게 작은 목소리가 들렸어요.


‘비는 앞으로 일주일은 더 내릴 것 같으니, 이곳에 있는 게 좋겠군.’

‘처음 본 사람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야?’

‘나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잘 해주는 사람은 아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따뜻한 욕조를 빌려주고, 묵을 방을 빌려주는 사람이? 그래도 다행이야. 이렇게 다정한 저택의 주인인 너를 만나서.’

‘……이번에는 다정한 사람인가.’


작은 목소리라고 해도, 주인님의 목소리는 좀 더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어요. 동떨어져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주인님의 말은 대화가 아닌 혼잣말 같았어요. 남자 역시 그걸 느낀 것 같았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들의 대화 주제는 여러 번 바뀌고, 중간쯤부터는 물소리가 너무 커져서 저와 사라는 듣지 못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물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저희 귀를 막은 것 같았어요. 원래라면 목소리가 작게나마 들릴 텐데, 중간부터는 숨소리도 들을 수 없었거든요.


저희가 욕조에 따듯한 물을 가득 채우고 나왔을 때, 남자와 주인님은 대화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남자의 얼굴에 매우 미묘했고, 주인님은 여느 때와 똑같으셨죠. 주인님은 욕실에서 나온 저희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셨어요.


“오토가 입을 옷을 가져다주도록. 되도록 품이 큰 옷이 좋겠어. 4층, 왼쪽에서 세 번째 방에 있는 옷장에 있을 거다.”


네, 주인님. 저와 사라가 동시에 대답하고, 그대로 방을 나왔어요. 물론 당시에는 주인님의 말을 믿지 않았어요. 주인님은 본래 이 저택에 무엇이 있는지 대략적으로만 아시는걸요. 남자의 몸에 맞을 옷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시겠어요. 저희는 그냥 그 방을 찾아보는 시늉을 하다가 빨래방의 하녀를 불러 급하게 옷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안되면 직접 만들던가요. 명령이 떨어졌으니 어쩔 수 없잖아요.


저와 사라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4층의 왼쪽에서 세 번째 방에 있는 옷장을 열었어요. 그런데……. 그곳에는 남자의 옷에 딱 맞을 것 같은 옷이 걸려 있었어요. 오랜 시간 주인을 기다린 것처럼!


저와 사라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죠. 주인님은 어째서 손님이 올 걸 알고 있었을까요? 그에게 맞을 옷이 이 방 옷장에 있을 거란 사실은 어떻게 알고 있고요? 이 어두운 밤에 찾아온 남자에게 느꼈던 두려움이 이제 주인님을 향하고 있었어요. 저기에 있는 주인님이 정말 저희가 아는 주인님이 맞을까요?


의문이 발목을 타고 목까지 기어 올라왔지만, 저와 사라는 모른 척 외면하기로 했어요. 주인님의 비밀을 모른 척하는 건 사용인의 기본 소양이니까요. 저와 사라는 파리한 안색으로 옷을 챙겨 주인님의 방으로 돌아갔어요.


남자는 그사이 벌써 목욕을 마쳤는지 조금 작은 샤워 가운을 여민 채, 주인님 앞에 앉아있었죠. 주인님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계셨지만, 귀 끝이 조금 붉으셨어요. 그 외에 다른 점을 꼽자면 방 안이 평소보다 조금 뜨거웠나? 욕실의 문이 열려서 수증기가 들어왔던 걸까요. 비가 와서 분명 눅눅했던 방이었는데……. 사라는 무언가 눈치챘는지 급하게 제 발등을 밟았어요. 약한 힘에 저는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다시 방을 살폈죠.


자세히 보니 주인님은 어딘가 불안한 사람처럼 검지로 팔걸이를 두드리고 계셨고, 남자는 젖은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매만지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어요. 시선이 창밖을 향하면서도 은근히 주인님을 향하는 모습이…….


묘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저는 방금 전에 느꼈던 두려움을 뒤로 던지고 마른 침을 삼켰어요. 정말 이 분위기 속에서 계속 있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할 때쯤에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어요. 주인님, 들어가겠습니다. 집사님이셨죠. 손님방을 살피겠다고 하셨는데, 마침 다 보셨나 봐요. 방으로 들어온 집사님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자세로 보고하셨죠.


“주인님, 2층의 손님방이 비어있습니다. 이 손님을 그 방으로…….”

“아니.”


주인님은 집사님의 말을 끊으셨어요. 집사님은 당황한 얼굴로 주인님을 바라봤어요. 원래 이렇게 사람의 말을 끊거나 하시는 분이 아니었거든요. 주인님은 당황하는 집사님을 내버려 둔 채, 남자를 보고 말씀하셨어요.


“다시 말하지만, 비가 그칠 때까지 이곳에 있는 게 좋겠군. 바깥은 위험하니까 말이야. 방은……. 내 옆방이 좋겠어.”


저와 사라, 집사님은 경악 어린 숨을 삼켰어요. 오늘 처음 본 남자를 바로 옆방에 놓는다니요? 그것도 주인님의 방과 연결된 그 방을! 모르셨나요? 주인님 방과 그 옆방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걸쇠로 잠글 수 있다지만, 빈약한 걸쇠라 문을 흔들기면 하면 금방 풀어지죠. 왜 그런 방이 있냐고요? 당연히 미래의 주인님의 가족분을 위한 방이죠! 저는 주인님의 가족분들 보다 먼저 그 방을 차지하는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어요.


“자, 잠시만. 제이슨,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2층에 있다는 손님방도 나는 괜찮으니까…….”


남자는 옆방이 어떠한 방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분위기를 읽고는 그 방을 거절했어요. 집사님도 그런 남자의 말에 뒤이어 입을 여셨죠.


“주인님, 제가 직접 손님방을 살폈습니다. 문제는 없으니 손님을 그 방을 모시는 것이…….”

“아니, 내 옆방이 좋겠군. 집사, 옆방을 다시 살피게.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남자와 집사님이 그리 말해도 주인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집사님께 직접 옆방을 살펴보라 하셨죠. 집사님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옆방으로 향하셨고, 저희는 가져온 옷을 남자에게 드렸어요. 그렇게 남자는 주인님의 옆방 손님이 되었죠.


그 뒤에 어떻게 됐냐고요? 사용인들이 뒤집어졌죠. 옆방을 만난 지 1시간도 되지 않은 남자가 차지했으니까요. 사라는 만난 지 1시간도 안 됐다는 말에 버럭 화를 냈어요.


“무슨 1시간이야! 그 분은……!”

“왜 그래, 사라?”

“……아냐, 아무것도.”


사라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어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목이 졸린 사람처럼 얼굴이 퍼렇게 변했거든요. 사라의 시선이 잠시 창밖으로 향했긴 했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냥 비가 쏟아지는 바다만 보였는걸요.


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사용인 대기 방에 들어갔어요. 오늘 새벽 시중 담당은 저였거든요. 새벽 시중은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에요. 종이 울릴 때 들어가 미지근한 물을 드린다거나 꺼진 촛불을 다시 살려드린다거나 간단한 야식을 들고 가는 거나……. 그런 거 말이에요.


사실 주인님은 새벽 시중을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으셨어요. 지나가듯 말씀하셨는데, 굳이 그 새벽까지 사용인들을 부리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새벽에 주인님의 시중을 든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요. 대부분 저는 꾸벅이며 졸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6시쯤 사용인의 방으로 돌아가죠.


남자가 손님으로 온 그날도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새벽 3시쯤이었나. 비는 여전히 쏟아지고 있었고, 눅눅함이 제 옷을 더욱더 무겁게 만들고 있을 때 종이 울렸어요. 주인의 부름이었죠. 저는 졸린 잠을 쫓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님의 방으로 향했죠. 복도를 걷는 내내 제 발소리만 들렸어요.


방으로 들어가니 주인님이 테라스 근처에 있는 탁자에 앉아 저를 보셨어요. 주인님 앞에 있는 의자가 뒤로 빠져있는 게 부자연스러웠죠. 저는 혹시나 싶어 옆방으로 연결된 문을 흘끗거렸어요. 역시나 걸쇠가 풀려있었죠. 제가 오기 전까지 남자가 있던 게 틀림없었어요. 새벽에 두 분이서만 있다니……. 하나의 추측이 머리에 세워지려는 찰나, 주인님이 헛기침하셨어요.


“큼, 내일 아침은 필요 없으니 점심만 가져와. 옆방의 손님과 같이 먹을 거다. 음식은 소화가 잘될 따뜻한 수프랑 부드러운 빵이면 된다. 주방이나 집사에게 전하도록.”


평소 먹는 메뉴라면 분명 탈이 날 테니까. 주인님은 그렇게 중얼거리시고는 이만 가보라며 손을 내저으셨어요. 더는 찾지 않겠다는 의미였죠. 저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오며 다시 복도를 걸었어요.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나아갈 때마다 저녁부터 외면하고 있던 의문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어요. 주인님은 어째서 저 남자가 평소의 메뉴로 식사하면 탈이 날 거란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이 남자는 한 번도 이 저택에서 식사한 적이 없는데 말이에요. 저는 주방에 주인님의 명령을 전달하면서도 계속 생각했어요. 주인님의 비밀을 외면하는 게 사용인의 기본적인 소양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이상한 일이었으니까요.


남자가 온 뒤로 주인님의 일상은 다시 변하셨어요. 책에 손을 대지 않으셨고, 언제나 곁에 남자를 두셨죠. 잠을 잘 때나 목욕하실 때를 제외하고 말이에요. 그가 시야에서 멀어지면 꼭 그의 이름을 불렀고, 무언가를 확인하듯 대답을 기다리셨어요. 남자는 그럴 때마다 주인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왜 그러냐고 되묻고는 했고, 주인님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하셨죠. 그 대화가 하루에 열 번은 넘게 반복되었어요.


가끔은 저와 사라를 바깥으로 내보낸 후,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실 때도 있었죠. 사라와 저는 굳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 이미 많은 흔적이 저희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죠. 남자가 온 지 3일이 지났을 때, 사용인 방에 대기하던 사라가 갑자기 저의 팔목을 잡았어요. 안색은 하얗게 질렸고, 봐서는 안 될 무언가를 본 사람 같았죠.


“눈치챘어?”

“사라, 너 어디 아파?”

“너, 모르는 거야? 아직도? 정말 눈치채지 못했어?”


사라는 저를 닦달하며 무언가를 말했지만, 저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저을 뿐이었어요. 사라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죠.


“그 손님이 거울에 비쳤을 때…….”


사라가 겨우 꺼낸 말은 끝을 맺지 못했어요. 주인님이 찾는 종이 울렸거든요. 사라는 종소리에 놀라 펄쩍 뛰어올랐어요.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는데,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죠. 저는 그런 사라를 달랬어요.


“이 방에서 쉬고 있어. 나 혼자 다녀올게.”

“자, 잠깐만……!”

“이 시간이면 간단한 심부름만 시키실 테니까. 금방 올게.”


저는 그렇게 사라를 방에 두고 홀로 주인님을 찾아갔어요. 그때 사라의 말을 들었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요? 지금 되짚어도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우리의 이야기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이 큰 틀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거예요.


방에는 주인님만 계셨어요.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죠. 저는 그 사실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주인님은 남자가 시야에서 벗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으신데……. 옆방에서 낮잠을 자는 걸까요? 아니, 그건 아닐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남자는 이 저택에서 낮잠을 잔 적이 없어요. 그 긴 시간 동안 한 번도요.


그럼 남자는 어디에 갔을까요. 불안감이 스멀스멀 땅을 타고 올라왔어요. 애써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저는 고개를 꾸벅이며 주인님 앞에 섰어요. 주인님은 저를 보시고는 눈썹을 들어 올리시며 중얼거렸어요. 이번에는, 이라고 하셨던가. 저는 주인님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시선을 아래로 내렸어요.


“사라는 어디 있지?”

“사용인 방에 있습니다. 불러올까요?”

“아니……. 됐다. 담요를 들고 나를 따라오도록.”


주인님은 그 말씀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셨죠. 저는 담요를 들고 급히 주인님의 뒤를 쫓았어요. 주인님은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중앙 홀로 향하셨어요. 주인님은 비가 내릴 때부터 중앙 홀의 근처는 한 번도 가지 않으셨는데, 대체 왜 가시는 걸까요? 아니, 괜한 물음이겠죠. 분명 그 남자 때문일 거예요.


중앙 홀에 다다랐을 때, 저는 거울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어요. 주인님도 마찬가지였죠. 저는 남자를 보고 불현듯 사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어요. ‘그 손님이 거울에 비쳤을 때.’ 사라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저의 시선이 거울 속으로 향했어요.


거울 속에는 잘 정리된 홀이 비치고 있었어요. 카펫은 짙은 회색을 띠고 있었고, 샹들리에도 먼지 하나 없이 반짝이고 있었죠. 그리고 그 가운데 짙은 붉은색이 홀로 존재했어요. 질척하게 흘러내리는 그것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죠. 저 먼 지방에서 자란다는 장미가 저런 빛을 띠고 있을까요. 붉은색은 흐르고 흘러 웅덩이가 되어있었어요. 카펫은 웅덩이에 적셔지고 있었죠.


그리고 그 위로 거대한 손과 눈동자가 얼핏 지나갔어요.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거대한 눈은 남자를 보고 있었고, 남자를 한 번에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은 손은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움찔거리고 있었죠. 제가 그 순간 비명을 지르지 못한 건 주인님이 곁에 계셨기 때문이 아니에요. 너무 겁에 질려서 소리 하나 내지 못했던 거예요. 저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거울 바깥의 카펫을 봤지만, 카펫은 여전히 잘 정리되어 있었어요.


저는 이번에는 주인님도 놀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거울 속에 저런 광경이 있는데 놀라는 게 당연하잖아요. 인간이라면 당연히 놀라는 장면이라고요! 하지만 주인님은 얼굴 하나 변하지 않고 제가 들고 있는 담요를 가지고 남자에게 다가가셨어요. 남자는 다가오는 주인님을 발견하고는 웃는 얼굴로 주인님의 이름을 불렀죠.


“제이슨! 길을 잃었는데 어떻게 찾아왔어?”

“네가 갈 곳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으니까.”

“또 그 말이네.”


주인님은 대답하지 않고 남자의 어깨에 담요를 걸쳐주셨어요. 꼼꼼히 몸을 감싸는 손길은 애정이 묻어있었죠. 저는 이 상황에서 그 무엇도 하지 못한 채 두 손을 모으고 침묵했어요. ……거울 속 담요가 붉게 물들고 있었거든요. 이 모든 상황이 꿈같았어요. 아니, 꿈이길 바랐죠.


남자는 여전히 거울을 등지고 있었고, 주인님은 그런 남자와 거울을 마주 보며 대화를 하셨어요. 언제나 방에서 하던 그런 대화였죠. 사소하고, 기억에 남지 않을 그런 대화요.


그런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 주인님이 잠시 거울을 보셨어요. 아니, 정확히는 거울 속 저와 눈을 마주치셨죠. 주인님의 시선은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매서웠어요. 그 매서움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했어요. 저는 입을 달싹이다가 다시금 움직이는 거대한 손을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뒷걸음을 치며 홀을 벗어났어요.


처음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속도였을 거예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저는 괴물에게서 도망가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뛰었죠. 사라가 있는 사용인 방으로요. 사용인 방에 있던 사라는 뛰어온 저를 보고 당황했어요. 저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는 입을 열었죠.


“무슨 일이야?”

“사라, 그 손님……. 그 남자 말이야…….”


저는 제가 본 모든 걸 이야기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사라의 손이 제 입을 막았어요. 사라의 시선이 또다시 창밖으로 향했죠. 저는 사라의 손을 떼어내려다가 같이 창밖을 보고 그대로 굳어버렸어요. 아니, 사실은 창밖이 아니에요. 우리가 본 건 유리였어요.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투명한 유리요.


유리에는 제가 중앙 홀의 거울 속에서 보았던 붉은색이……. 거대한 눈이 저와 사라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저게 왜 이곳에 있지? 이곳에는 우리밖에 없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죠. 사라는 창백한 낯으로 천천히 손을 내렸고, 저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어요. 우리는 저 붉은색이, 저 거대한 눈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신했어요. 말을 꺼내는 순간 우리의 미래는 없다는 사실 말이에요.


이 상황이 두렵고 미칠 것 같았지만, 사라와 저는 침묵하기로 했어요. 아니, 외면이 더 옳은 단어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저희의 최선이었는걸요.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어요. 그 사이 몇 번이고 붉은색과 거대한 눈 혹은 거대한 손을 목격했죠.


그 사이 주인님과 남자는 연인이라는 단어가 어울릴만한 사이가 되셨어요. 가끔은 서로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고,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셨죠. 사용인 대부분은 이내 남자를 인정했어요. 주인님이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 행동, 손짓, 어투, 목소리, 그 모든 것에서 애정이 묻어나왔거든요. 주인님께 사랑이 찾아오다니. 집사님은 손수건을 눈물을 찍어내며 기뻐하셨죠. 저와 사라도 그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어요. ……유리창에 붉은색이 보이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두 분이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와중에도 비는 그칠 기미가 안 보였어요. 식량이 점점 바닥을 보이기 시작해 집사님만 애를 타고 계셨죠. 남자도 그런 집사님을 알아챘는지 종종 주인님께 말했어요.


“나라도 바깥에 나가볼까? 절벽이 좀 위험하긴 하지만, 조심한다면 마을까지 갔다 올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 소리 하지 마, 오토. 비는 곧 멈출 거다.”

“하지만 식량이…….”

“집사가 걱정이 많을 뿐이야. 우리가 굶어 죽을 일은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 곁에 있어.”


남자는 결국 주인님을 껴안았고, 다시 사랑을 나누었죠. 이러한 일상이 영원히 이어지면 좋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유리창을 외면하는 저와 사라나 남자를 거울 앞에 데려가지 않는 주인님을 보고 말이에요.


맞아요. 주인님은 그날 이후로 남자가 거울 앞에 서지 못하게 했어요. 힘을 꽤 쓰는 이들을 시켜 저택 안에 있는 거울이란 거울을 모두 치워버렸죠. 딱 하나 치우지 못한 건 중앙 홀에 있는 거울뿐이었어요. 그 거울은 왜 치우지 못했는지 저희는 알지 못해요.


문제는 남자가 이상함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는 거죠. 남자는 틈이 날 때마다 중앙 홀로 가려 했어요. 주인님은 그런 남자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듯 몇 번이고 잡아 와 자신의 곁에 두셨고, 결국 저와 사라에게 명령하셨어요.


“절대 오토가 거울을 보지 못하게 해.”


단호한 어투에 저는 남자를 막지 못한다면 주인님께서 노하실 거라고 확신했죠. 그렇기에 고개를 끄덕였고, 몇 번이나 중앙 홀로 가려는 남자를 막아섰어요. 남자는 그럴 때마다 눈매를 아래로 끌어내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죠.


“제발, 잠시만이라도 보고 오게 해줘.”

“안됩니다. 주인님께서 기다리시니 방으로 돌아가시죠.”


저와 사라는 정해진 말만 하는 곰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어요. 남자는 그때마다 아쉬운 얼굴로 주인님께 돌아갔죠. 저는 남자가 결코 거울을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주인님의 명령도 있었지만, 남자가 그 붉은색을 알게 된다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래요, 최악의 상황. 남자가 문을 두드렸을 때 보았던 그 환상 속의 상황 말이에요. 발아래에 붉은 웅덩이가 넓게 퍼지고, 누군가 그 뒤에 철퍼덕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하지만 사라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아요. 제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비가 내린 지 정확히 3주가 되는 날이었어요. 아니, 남자가 이 저택에 들어온 지는 2주가 된 날이라고 해야 옳겠네요.


잠시 초상화를 보러 가겠다고 하던 남자와 그 남자를 따라간 사라는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어요. 주인님은 자리에 앉아 차를 홀짝이시다가 시간을 보았죠. 시계는 정확히 4시를 가리켰어요.


“결국 이렇게 됐군.”


주인님은 딱 그 한마디만 하셨죠. 저는 그 말을 듣고 알아챘어요. 사라가 남자를 막지 않았고, 남자는 결국 거울 앞에 섰다는 것을요. 무력감이 가슴을 두드렸어요. 결국 이번에도. 주인님과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던 저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질문을 던졌어요.


“주인님께서는 어떻게 손님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건가요? 분명 손님이 찾아온 건 이가주일 전의 밤인데, 주인님께서는 손님을…….”


수십 년을 본 사람처럼 대하고 계시잖아요. 차마 그 말을 뱉지 못했지만, 주인님은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지 알아채신 눈치였어요. 주인님은 제 말에 짧게 웃으셨죠.

“이번에는 네가 빨랐군. 이번 역시 사라가 빠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저는 주인님의 이야기에 숨을 죽였어요. 주인님은 나긋한 어투로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셨죠.


“지난번에는 사라가, 그전에는 집사가, 그 전전에는 또 사라였던가. 자네가 이렇게 묻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른다면 됐다. 네가 알아챘다면, 곧 시작될 테니.”


주인님께서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으시고, 숫자를 세셨어요. 셋, 둘, 하나. 주인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비명이 들렸어요. 사라의 목소리였죠. 주인님은 사라의 비명에 놀라는 기색 없이 일어나 걸음을 옮기셨어요. 산책하러 나가는 사람처럼, 느린 걸음으로…….


저는 그 뒤를 따르며 손에 고인 땀을 치마에 닦아냈어요. 사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상황을 보고 싶었지만, 이대로 앞질러 간다면 저는 영원히 그 무엇도 알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어 달려 나가지 못했어요. 주인님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읊으셨죠.


그건 아주 먼 나라의 언어 같았고, 들판에서 부르는 노랫소리 같았으며 중요한 서약의 맹세 혹은 저주의 주문 같기도 했어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저는 주인님께서 거대한 무언가의 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었죠.

주인님을 따라 중앙 홀에 도착했을 때, 사라를 발견할 수 있었어요. 사라는 홀의 문가에 서서 두려움에 찬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죠. 아니, 사라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저택에 있는 사용인 모두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사라의 비명을 듣고 달려왔던 모양이에요.


그들은 둥글게 원을 그린 채, 거대한 거울을 둘러싸고 있었죠. 아니, 거울 앞에 무언가가 있었어요. 사람이 빼곡해서 그것이 무엇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고요. 주인님은 그런 사용인들을 바라보다가 손을 휘저으셨어요. 사용인들이 파도처럼 갈라지는 도중, 저는 모두의 신발에 붉은 물이 튀어있다는 걸 눈치챘어요. 그 붉은 물을 인식함과 동시에 비릿한 향이 코를 찔렀고요. 그건 평생 인지하지 않고 있던 냄새였죠. 그래요, 그건 피였어요. 붉은 피가 회색 카펫을 적시고 있었어요.


그 가운데에 있던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아시겠죠? 맞아요. 그곳에는 오토, 그 남자가 있었어요. 카펫이 흡수하지 못한 피 웅덩이 가운데에 누워있었죠.


남자는 어디에선가 뛰어내린 거 같았어요. 아니, 그는 꼭대기에서 뛰어내렸겠죠. 거울 속 거대한 눈과 시선을 마주하고, 쫓아오는 거대한 손을 피해 계단을 올라 꼭대기에 도달했을 때 자신을 던졌을 거예요. 그 상황을 보지 않았음에도 저는 예상할 수 있었어요. 남자의 뼈는 으스러졌고, 온몸은 붉은색으로 물들었어요. 거울 속처럼 말이에요. 색색거리는 숨만이 그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었죠.


주인님은 그런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고, 거울을 등진 채 그를 끌어안으셨어요. 옷이 피에 물드는 것도 개의치 않아 하셨죠. 저는 주인님이 죽어가는 남자의 숨을 어떻게든 이어 붙일 거라 생각했어요. 분명 주인님은 그를 사랑하셨고,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셨으니까요. 하지만 제 예상과 다르게 주인님은 담담한 목소리로 남자와 대화하셨어요. 죽어가는 사람하고요!


“오토, 또다시 이렇게 됐군.”


이제는 지겨운 단어, 또 다시를 말하며 주인님이 덜덜 떠는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닦으셨어요. 붉게 물들어있던 남자의 얼굴이 그제야 본모습을 찾았죠. 주인님은 남자의 선택에 슬퍼하고 계셨어요. 아니, 괴로워하셨다고 해야 할까요. 어느 표현이 옳을지 모르겠네요.


여태껏 눈을 감고 있던 남자는 느리게 눈을 뜨고 주인님을 보았죠. 파랗던 그 눈동자는 이 저택에 들어왔던 첫날과 다르게 고단해 보였어요. 수십 년을 살아온 노인의 눈이 그것과 비슷할지 몰라요. 남자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죠.


“……이제 그만해도 돼, 제이슨.”


제가 남자의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건, 사용인 모두가 침묵했기 때문이었어요. 주인님과 멀리 있던 몇 명은 이러한 상황에 당황해 침묵하고 있었고, 저를 포함한 몇 명은 미지의 것을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사라를 포함한 몇 명은 공포에 질려 꼼짝하지도 못했죠.


주인님과 남자는 그런 저희를 신경 쓰지 않았어요. 당연한 이야기예요. 이 중앙 홀은 저희의 세계가 아닌, 남자와 주인님의 세계였으니까요. 저희는 이 세계에서 제외된 엑스트라였어요. 주인님은 짧게 혀를 차고 다시 말씀하셨죠.


“내가 이 정도로 포기할 줄 알았나. 기다려라, 오토. 너를 이 굴레에서 빼줄 테니.”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리 속삭인 주인님은 또다시 무언가를 읊으셨어요. 동시에 저는 그동안 잊고 있던 걸 떠올릴 수 있었죠. 이걸 왜 까먹고 있었을까요. 어떻게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들을.


주인님은 매번 이 순간마다 확신을 가지고 계셨어요. 저 남자, 오토가 피에 물들어 죽음에 끌려갈 때마다 말이에요. 그럴 때마다 저희는 또다시 반복되는 이 상황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휘말렸죠. 그것이 한 번, 두 번, 세 번……, 수십, 수백, 수천 번이 넘게 반복되었어요.


무슨 뜻이냐고요? 이런, 아직도 기억해내지 못한 건가요? 떠올려 봐요. 우리는 이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했잖아요. 이렇게 마주 보고 말이에요. 이 저택에서 벗어나지 못한지 족히 백 년은 넘었을걸요. 거짓말하지 말라니, 나는 언제나 진실만 이야기하고 있어요. 기억하지 못해도, 어렴풋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내가 느낀 것처럼 말이에요.


하여튼 제가 모든 걸 떠올렸을 때, 남자도 모든 걸 떠올렸는지 잠시 우리를 흘끗거렸어요. 눈동자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겨있었죠. 맞아요. 그는 자신이 주인님을 말리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남자는 색색거리는 숨을 내쉬다가 겨우 한마디만 꺼냈죠.


“……사랑해, 제이슨.”




정말 숭고한 사랑이에요. 이 지옥 같은 시간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는 숭고한 사랑. 저는 급하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죽였어요. 이 순간 그 말을 꺼냈다가는 추방당할 게 뻔했거든요. 이 반복에서 말이에요.


소리를 내면 추방당하는 거냐고요? 아니요. 그런 거면 처음 반복 때 모두가 사라졌겠죠. 지금 이 반복에서 추방되는 건, 주인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에요. 그렇게 사라진 게 몇 명이었더라. 그건 정확히 기억나지 않네요. 확실한 건 이번에는 사라가 추방당할 거 같아요. 사라는 너무 오랜 시간, 이 반복을 눈치챘고, 하필이면 남자를 거울로 안내했으니……. 사라와 이별할 시간이에요. 좋은 친구였는데 말이죠. 사라 역시 자신이 추방당할 걸 눈치챘는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어요.


그 사이 남자의 숨이 조금씩 작아졌어요. 거울에 비친 거대한 눈은 그런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고, 손은 당장이라도 남자를 낚아채려고 손을 벌리고 있었죠. 주인님은 그 손이 거울의 앞에 도달한 순간, 속삭이셨어요.


“나도 사랑한다, 오토. 잠시 이별이군.”


주인님이 ‘이별’이란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모든 게 멈췄어요. 정확히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되감기고 있어요. 카펫을 적시고 있던 피가 느리게 남자의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저 역시 태엽 시계가 되돌아가듯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리고 뒤로 걷기 시작했죠.


그 모든 상황에서 자유로운 건 주인님뿐이었어요. 거울 속 거대한 손과 눈도 다시금 멀어졌죠. 주인님은 되감기는 남자에게 짧게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나셨죠. 그리고 입술을 꾹 깨문 사라의 앞에 섰어요. 불쌍한 사라.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본 사■의 모습이에요.


그 광경을 끝으로 저는 느리게 복도를 거슬러 갔어요. 모든 걸 유일하게 기억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저는 주인님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영혼을 걸고 이 거대한 반복을 몇 번이고 하고 계시니까요. 수천 번의 갈래에서 남자가 모두 죽었으니, 포기할 법도 하신데 말이에요. 뭐, 모든 상황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남자도 대단하지만 말이에요.


다음에는 누가 추방당할까요? 이번에는 ■■였으니 이제 제 차례일지도 몰라요. 추방당하면 어떻게 되냐고요? 글쎄요. 어쩌면 이 거대한 반복에서 벗어나 마을에서 눈을 뜰 수도 있고, 아예 영원히 끝이 날 수도 있고…….


무엇이 됐든 ■■와 추방당한 모두의 행복을 빌어줄 수밖에요. 이런, 벌써 3주의 시간이 다 되 감아졌네요. 또다시 반복될 시간이에요. 그럼…….

제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아, 날씨에 대해 말하고 있었네요. 맞아요. 이 시기의 저택, 아니 이 지역은 비는커녕 구름 한 점 보기 힘들어요. 해가 내리쬐는 게 너무 무더워서 모두가 얇은 유니폼을 입고 저택의 그늘로만 지나다니죠. 원래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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