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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 합작 고딕호러
    합작 고딕호러
  • 2021년 10월 30일
  • 9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31일













모든 이에게는 감춰야 할 비밀이 있단다, 랴오위.


몇 세대를 내려가도 어떻게든 회자될 우아한 대저택. 사용인의 수는 셀 수 없이 많고, 삭고 닳을 외벽에도 귀한 푸른 염료를 사용해 섬세한 조각을 양각했으며, 내부에는 귀한 것들이 발에 치이도록 많은 대저택. 이 저택에서는 늘 미약한 썩은 내가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귀한 것으로 저택을 꾸미고 바다를 건너온 귀한 향료들로 저택을 덮어 봐도 잠시일 뿐. 온갖 귀한 것을 먹고 자랐다지만 결국은 괴물의 위장이다. 사람의 살과 피를 팔아 제 배를 불린 것들의 둥지다. 아무리 좋은 것을 삼켰다고 한들 제 본연의 체취까진 가리지 못하는 탓이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특히나 지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악취는 지독해졌다. 숨겨 온 부정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는 양. 보통은 가주의 엄격한 관리와 감시하에 최하층까지는 갈 수 없었으나, 후계를 정한다는 명목과 후계를 위한 특별한 재산 확인이라는 명목하에 두 후계 후보의 방문이 허용되었다. 지하실을 내려가는 늙은 가주의 얼굴은 열락에 잠긴 것처럼 붉다. 모든 감정과 감흥이 무뎌질 때도 됐건만, 욕망만은 저리 살아 반짝인다. 불에 제 몸을 던지는 자의 눈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저것 또한 아름다운 생명의 불이라 칭하겠지. 저딴 것도. 가벼운 비웃음이 남자의 머릿속을 채운다.


가주가 -그렇게도 감춰 두던!- 지하실의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보온조차 안 되는 듯 서늘하고, 넓지만 답답하며, 고즈넉했으나 소음 없이 그저 텅 빈 공간이었다. 발목에 족쇄를 찬 채로 구석에 박제되듯 앉아 이쪽을 응시하는 여인을 제외한다면. 이 공간에는 그녀만이 존재했다. 오로지 그녀만이 이 저택에서 썩은 내를 풍기지 않았다. 저택의 흉측한 악취는 오롯이 그녀를 타인에게서 숨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지하실 문을 경계로 다른 공간과 이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안에서는 은은한 목련향만이 감돌았다. 아, 존경하는 내 아버지께서는 이제 감금에마저 손대시는군.


여인은 희고, 매끈하며, 작고 가냘팠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네글리제가 여인의 몸을 감싸다가도,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끝에 가서는 흩어진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천에 밀려 존재감을 잃기는커녕, 귀한 상아 같은 투명한 몸을 가려 신비로움을 더했다. 지하에 갇혀 빛을 받지 못한 탓인지 본래도 하얬을 살결에는 핏기가 전혀 없다. 예술가가 심혈을 다해 빚어 낸 조각상처럼, 전시용 유리구슬처럼 매끄러웠으나… 꼭 자신은 인간이라고 외치기라도 하는 양 얇고 길쭉한 손가락부터 마른 팔까지 흉터가 가득했다. 자잘한 것부터 큰 상처까지. 오래되어 흉터로 남은 것부터 피딱지가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까지.


함께 있는 누군가는 그 흉터를 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남자는 달랐다. 이 흠이야말로 그녀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임을, 이 흉터야말로 우리가 그녀를 잡아 둘 수 있는 덫임을 자연스레 직감했다. 동양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오로지 필요 때문에 다시 주워진 중고품. 길거리에 버려져 흙을, 썩은 빵을, 하수구의 고인 물을 먹고 자란 그만이 직감했다. 이것은 텅 빈 것이다.


여인이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응시한다. 눈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생에 꼭 필요한,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어야 할 사랑도, 기쁨도, 회한도 없이 지독히 무감각하다. 말라 버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선대께서 동양인 주술사에게 받았던 것이다.”


애초에 감정 따윈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것이다. 인간보다는 귀신에 가까운 존재. 문득 남자는 상대를 향해 웃어 보인다. 이 세기에 소유의 ‘물건’을 향해 자상하게 대하는 이들은 적었다. 그것이 비록 첫 만남이라고 할지라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 존재다. 악마가 아니니 은장도도 소용없으며,”


그러니 남자가 그린 듯 웃는 이유는 단순했다. 이 존재를 아껴 보고 싶다 생각했다. 죽음을 선택할 의지조차 빼앗긴 채, 텅 빈 채로 그저 존재만 하는 이 여자가 자신에게 웃어 주고, 족쇄 없이도 이 지하실을 떠나지 못하는 상황이 보고 싶었다. 스스로 자신에게 걸어와 안기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런 가볍고도 추한 욕망. 동시에 그 늙은 것을 닮아 버린, 피를 타고 내려오는 추저분한 욕망 따위. …단순하게 말해서, 첫눈에 반한 것이다. 저를 영원히 사랑해 주지 못할 존재에게.


“가문에 부귀와 영화를 가져다주지. 예언해 내고, 중요한 일에 행운을 가져온다.”


그러니 단 한 명의 후계자에게만 이것을 물려주겠다는 선포가 울린다. 곧 옆에서 비웃음을 참지 못하는 형제의 가래 끓는 목소리 또한 울렸다. 저것도 성대라고 달고 다니니, 내 늘 창피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적어도 묵직한 멋이 있어야 인간으로도, 귀족으로도 품위가 사는 법인데. 길가 비렁뱅이를 형으로 모시는 게 낫겠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우리를 위한.


규칙 하나, 식사는 일 년에 한 번. 인간의 영혼으로.


규칙 둘, 그녀가 스스로 내는 상처는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있다. 죽지 못하게 잘 돌볼 것.


규칙 셋, 사랑하게 된다면, 자신을 그녀와 격리하거나 후계를 찾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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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는 뻔하다면 뻔할 이야기. 늙은 가주는 잠든 듯 죽었다.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는 화려한 장례식이 열렸다. 비는 하늘이 우는 것이라 하던가. 그 긴 장례 절차 속 비 한 방울조차 보이지 않았고, 문객들조차 옅은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추잡하고 부끄러운 삶이 하나 끝났을 뿐이었다.


하나뿐인 형은 미쳐 자살했다. 살아 있는 동안 어느 날은 죽은 제 아비를 보았다고 했고, 어느 날은 어린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고 했다. 수일 동안 망상이 반복되자 그를 따르던 사용인들도 난색을 보였다. 광증이 옮기라도 하면 어쩌냐면서. 남자는 그저 이해한다는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포상을 안겨 주고, 제가 형님을 돌보겠다 말했다. 동시에 그저 식사 담당일 뿐인 하녀를 더욱 제 가까이에 두었다. 남자가 제 형을 돌본 지 이 주, 형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 모두가 형을 안타까워했고, 젊은 나이에 가족을 잃은 남자를 동정하고 그가 빠르게 잊기를 바랐다. 그래도 두 분 모두 곱게 가셔서 다행이에요. 그렇죠, 랴오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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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이 지났다. 두 명이 죽어 나갔음에도 가문은 되려 큰 호사를 누렸다. 어리고 부드러운 짐승의 머리, 단 한 번도 달려 보지 못한 사슴의 살로 만든 스튜, -다 커 버린 짐승에게도 물론 부드러운 부분은 있었다- 오로지 그 짐승이 가지고 죽었어야 할 혀를 얇게 떠 와인에 재운 것, 채 죽지 못해 팔딱거리는 상그러운 심장이 식탁마다 올랐다. 이것들은 모두 그가 미식만을 위해 만든, 환경을 집요하게 통제한 농장에서 공수되어 올라오는 것들이다. 그가 얇게 뜬 혀와 버터를 올린 빵을 몇 번 우물대다 입을 연다.

“연아. 식사가 마음에 안 드니?”

“….”


연은 말없이 제 몫의 접시를 든다. 차린 이의 정성을 보아 몇 번 식기를 달그락대다가도, 그마저도 힘들었는지 조심스레 식기를 내려두었다. 모든 것이 소리 없이 이루어진다. 살아 있으나, 살아가지는 못하는 자의 행위는 이리도 고요했다.


불요하고 무익한 짓이다. 그녀가 평범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하고 게워 내는 것을 그는 진작부터 알았다. 인식하고 있음에도 매 저녁 새로운 음식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인간 사이에 동화되기 위해 하는 연습이라는 거짓말에 넘어가 억지로 인간의 것을 삼키고, 제가 당신에게 제대로 말한 적 없으니 악의가 담긴 것은 아닐 거라며 착각하고, 토기를 참아 가며 겨우 끄덕이는 그녀를 보기 위한 악취미.


“잘 먹으니 보기 좋구나.”

“잠시… 식사 중 실례지만, 먼저 일어나도 괜찮으실까요?”

“그러렴.”


팔딱거리는 심장이 이내 잦아들자 시선을 살포시 내리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반쯤 내려온 속눈썹에는 이젠 어둠이 아닌 푸른 핏빛이 잘게 내려앉는다. 저택의 색이다. 남자의 눈과 같은 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눈썹에 쌓인 연보랏빛 눈만은 늘 광채를 잃지 않았다. 그곳이 성역이라도 되는 양, 연보랏빛이 존재하는 곳에는 푸른 핏빛이 내려앉지 못했다.


“…나갔다, 올게요. 모쪼록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식사하세요.”


나가 봤자 저택 안인 것을. 그녀는 늘 자신의 허락을 구했다. 웃어 주진 않았으나, 자신이 제 소유인 것을 기억하고 무엇이든 제 허락을 구했다.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나의 괴물은 교육을 잘 받은 탓인지, 혹은 천성이 그런 성격이었는지.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저 이 불합리를 불합리라 생각하지 못하고 받아들인다. 제게 주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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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을 얻은 지 3년이 지났다. 비단을 찢어도, 신에게 영혼을 바친 자를 식사랍시고 잡아 와도 여전히 그녀는 웃지 않았다. 이번 해 들어온 모든 보석을 고아원에 기부했을 때조차도. 악의도, 선의도 무엇 하나 그녀를 제대로 웃게 하지 못했다. 그렇군요. 라며 작게 읊조리곤 제게 고개 숙일 뿐. 그래서 그는 제가 다스리며, 제 소유인 땅 위, 대부분의 작물을 태웠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부터 닿지 않는 곳까지. 저택의 바람이 닿는 곳을 모두 불태웠다.


“다른 작물을 심으실 건가요?”

“응, 그럴 예정이란다. 어떤 걸 심을까?”

“…랴오위 씨께서 원하시는 것으로요.”


그녀는 입을 몇 번 벙긋거리다, 단 한마디만을 남기고 입을 닫아 버린다. 이런 적은 없었는데. 무엇이? 랴오위는 연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표정은 열락에 젖은 예의 그것이다. 이성은 무뎌지고, 평생 돌려받을 수 없는 사랑에 눈이 멀어 죄 저지름에도 죄의식 같은 것은 없다.


“다음번엔 네가 웃어 줬으면 좋겠어.”

“…? 그 정도야 지금도 해 드릴 수 있답니다.”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야. 연아.”


뜻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반문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다. 땅 위에 발붙여 자란 것들만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다음을 도모할 뿌리조차 남기지 못하고 열화에 사그라지는 생명을 본다. 많은 이가 죽을 것이다. 많은 이가 이 재 아래 묻힐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보는 이의 눈에 담기는 것은 동정도, 죽지 못하는 자의 원망도, 슬픔도 아니다. 연보랏빛엔 늘 무엇도 담기지 않았다. 오로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한 미약한 호기심, 호기심이라고도 부르기 힘든 무언가만이 짧게 스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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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로만 5년이 지났다. 눈치가 없거나 돈이 급한 사용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저택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택은 그녀의 예언 아래 나날이 번영했다. 사교계에서는 가주가 아비와 형의 길을 따라간다는 은밀한 소문이, 사용인과 영주민 사이에서는 마녀에 미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온갖 귀한 것들을 방마다 밀어 놓고, 남은 방에는 사람을 넣어 두고 굶겨 죽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재 위에는 꽃을 심었다. 연보랏빛과 푸른빛의 꽃이 저택과 부지에 가득 찼다. 미학인지, 아집인지, 집착인지. 사람을 고용해 둘 외의 다른 색의 풀을 모두 뽑아냈다.


꽃의 향이 과하게 짙어 환각을 보는 자들이 종종 나타났다. 예민한 몇몇은 향에 질식해 쓰러지기도 했다. 제발 저 꽃을 태워 달라는 의견은 모두 돈으로 입막음되거나 묵살됐다. 단지 제 괴물이 이 꽃의 향을 맡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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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흉년이 들었다. 8년째의 일이었고, 당연히 예견된 것이었다. 여전히 저택의 식탁 위에는 여리고 부드러운 살들, 귀한 향료들과 꽃 향을 남기는 적포도주가 올랐다. 사용인들 또한 도망간다거나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나가면 굶어 죽는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잘 아는 자들은 그들이었다. 이 저택은 현실과 유리된 곳. 괴물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기꺼이 기생해 살 수 있다. 가장 눈치가 빠른 것은 내몰린 약자들인 법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유리될수록 균열은 커진다.


그가 제 괴물에게 프러포즈하기 위하여, 가장 아름다운 보석을 찾기 위해 보석 광산으로 떠난 날 밤. 그를 기다리며 복도를 배회하고 있을 뿐인 연에게 누군가 다가온다. 그걸 알아채는 데 한참 걸린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체구와 비슷하지만, 훨씬 깡마른 여인은 절실한 얼굴을 하고, 파들거리지만 망설이지 않는 손은 칼을 겨눈다.


“소리 지르지 마! 움직이지도 마. 먹을 것만 찾으면, 바로 나… 나갈 테니까…”

“…그렇군요.”


위협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히려 들키지 말라는 듯이, 연은 사뿐하게 몸을 물려 지나갈 길을 만들어 주었다.


“…1층 연회실 옆에 식료품 창고가 있어요. 가져가기 쉽도록, 천 가방이라도 가져오셨으면 좋았겠지만. 선반 크리스털 통엔 후추가 들어 있으니, 그걸 가져가도록 하세요. …아.”


뭔가 생각난 듯한 연이 제 귓가에 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그 행위를 위협으로 착각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복도를 가득 메운다. 비명은 찰나였다. 연의 복부를 관통하는 칼의 날카로움을 연이 볼 수 있는 것 또한 찰나였고. 복부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내뱉은 짧은 신음은, 여인의 울음소리에 묻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자, 잘못… 잘못했어요…. 당신이 그 괴물을, 괴물을 부를까 봐…”


뒤로 나자빠진 여인의 목소리가 애처로울 정도로 갈라졌다. 양손으로는 자신을 향해 빌고, 양다리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쳐 댄다. 공포에 질린 표정은 우는 낯이구나. …괴물, 그가? 아니면 내가? 여러 생각이 연의 뇌리를 스쳤다.


연은 먼저 제 복부에 꽂힌 칼을 빼내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두었다. 잘그락. 툭, 툭. 쇠와 대리석이 맞닿는 소리는 차가웠고, 복부에서 흘러내리는 연의 피는 그것보다 차가울 것이 자명했다.


달빛 아래에 선 연은 핏기 없이, 표정 없이 빛났다. 전혀 살아 있는 생명 같지 않았으나 흰 네글리제에 가득 묻은 붉은 피만은 생명의 색이었다. 오로지 타인의 악의 속에서 연은 살아 있다. 복부에 꽂힌 칼을 빼내느라 피가 송골송골 묻은 손을 올려, 제 귀에 걸려 있는 귀걸이를 풀어 낸다.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티 없는 새하얀 진주에 피가 스며든다. 엉망진창으로 발음하며 뒷걸음치는 여자의 손을 벌려 그 위에 귀걸이를 올린다. 연이 상대를 향해 옅게 웃어 보인다. 긴장을 풀고 도망치라는 의미였고, 돕겠다는 의미였으나 여인에게는 그저 공포다. 그저 괴물로, 혹은 제 이성을 좀먹을 존재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아, 나머지 하나도 가져가시겠어요?”


여인은 곧 기어가듯 몸을 움직여 얕은 피 웅덩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연의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는 옅었고 차가웠다. 그 이질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는 여인을 본다. 살기 위해 애처로워진 사람을 본다. 여인이 몸을 끌면서 도망간 탓에 복도엔 길게 핏자국이 남았다. 연은 이미 아물어 버린 제 복부를 문지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끝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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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탁. 장작이 타오르는 향과 소리가 저택을 감싼다. 옛적. 불이 생과 가장 닮은 불빛이라 칭한 적이 있었다. 불은 늘 붉었다. 제 악의로 타오를 때도, 저를 죽이기 위해 타오르는 지금도. 저택에서 도망친 여인은 저곳에 괴물이 있다며 수도원으로 달려갔다. 수도원은 왕궁 기사들을 불러 축복하고는 그들에게 칼과 횃불을 쥐여 주었다. 성스러운 달이 뜨는 날 모두가 저택을 에워싸고, 일시에 불을 붙이고 환호한다. 모두 괴물을 죽이기 위함이었다.


자신이 이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타오르고 있음에도 그는 오히려 웃었다. 그에게 있어 후회도 슬픔도 단 하나뿐이니까. 아직 그녀의 웃음을 보지 못했는데 죽어야 한다는 것. 비명과 지탄의 목소리가 저택 바깥을 메운다. 악마를 죽여라! 그가 그랬듯 저택째로 태워라! 신께서 용서하실 것이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직 살아 있는데, 섭섭한 말씀을.”


그는 불빛으로부터 연을 숨기듯 감싸 안았다. 단단하고 피비린내 나는 살과 여리고 향기 나는 살이 맞닿는다. 그는 유순하게 몸을 기대 오는 연을 단단하게 껴안고 속삭였다.


“사랑하니까, 이곳을 나가 네 삶을 살라는 말은 못 해 줘.”

“…알고 있어요.”


그가 그런 말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는 양, 혹은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양, 연은 품에서 잘게 고개를 기울인 채로 눈을 깜빡였다. 연의 대답에 그는 환희에 젖어 웃었다. 함께가 아니라면, 너는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다. 차라리 함께 죽어 버리자. 함께 타올라, 우리 영원히 묶여 버리자. 짙은 욕망으로 빛나는 눈은 탁하고 어두컴컴해 그 끝조차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감히 제 사랑을 가늠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같이 죽자, 연아.”

“….”

“네가 나를 떠나기 전에.”


귀한 염료로 칠해졌던 눈은 사랑에 멀고, 욕망에 빛을 잃었다. 그러니 연은 그 앞에서 그저 긍정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늘 언제고 동경했던 것을 향해. 유일한 제 인간을 향해. 이해할 수 없으니 긍정한다. 이런 것이 인간의 사랑이라고. 책에서 본 것과는 다르지만, 이런 것도 당신에겐 사랑이라고.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연이 왼손을 뻗어 남자의 뺨을 감쌌다. 남자의 뺨에 매달려 있던 피가 기다렸다는 듯 연의 손바닥에, 약지에 걸린 반지 손가락으로 스며든다.


“함께 죽어 드릴게요.

이게 제가 당신께 보여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에요….”


연은 망설임 없이, 느릿하고 소리 없는 손길로 푸른 병에 담긴 독약을 집어 들었다. 두 모금을 입에 가만히 머금고 상대를 응시한다.


옅은 연보랏빛 눈은 깊고도 맑아, 마찬가지로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에게는 여태 가주가 된 첫날을 제외하고 숨겨 온 말이 있었다. 너는 이 말을 기다리고 있구나. 랴오위는 직감한다.


“…사랑해.”





생애 끝에서야 겨우 내뱉는 고백. 결코, 아름답다고는 말할 수 없는 추잡하고 음험한 찬미. 과분할 정도로 달콤한 끝. 그는 몸을 숙여 입술에 입술을 겹친다. 맞닿은 입 사이로 숨과 웃음을 흘려 넣는다. 피인지, 독약인지 모를 것이 입에서 입으로 넘어온다. 그의 체온이 그녀의 것과 똑같아졌을 때 그녀는 조금 떨었다. 춥다는 감각을 처음으로 여실히 체감함과 동시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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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은 영지민들에 의해 모두 타올랐으나 둘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그 둘이 같은 존재가 되어 함께 도망갔다고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함께 끝을 맞이했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남자에게 있어 과분한 끝임을 부정하는 자는 없었지만.


남자의 땅과 재산은 모두 국고로 환산되었는데, 가장 값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약혼반지만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녹아 버린 거야. 누군가 중얼거렸고, 다들 저주라도 받을까 두려워 이 저택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재 위에는 무엇이든 자랄 수 있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생명은 윤회하고, 재 위에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날은 반드시 오는 법이니까. 다만 몇 해가 지나도록, 이 저택 위엔 그 무엇도 자라지 않았다. 새도 쉬어가지 않았으며, 눈조차 쉽게 얼지 못했다. 이 부지에 발을 들인 자들은 천천히 죽어갔다.


이 저택 위에선 아무것도, 그 무엇도 자라지 않을 것이다. 자라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이 그녀 외에 다른 생명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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