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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사진: 합작 고딕호러
    합작 고딕호러
  • 2021년 10월 29일
  • 2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31일







0.



이 고장에는 베클레아 가의 시골 영지가 있다. 베클레아 가의 귀족들은 고즈넉한 평화에서 오는 행복을 종교적 충만함 다음으로 제일이라 여겼으므로 언제나 나긋나긋한 말씨와 고요한 품행으로 주변을 행복하게 했다. 컨트리 하우스에서 일하는 사용인들 또한 언성 한 번 높이는 일이 없다. 자애로운 주인과 섬세한 안주인께 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면 평생도 숨죽이고 살 이들이다.


세련된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대저택이 우리의 터전이다. 큰 창은 전부 길쭉한 반원형인데, 간혹 시종들이 환기를 위해 열곤 하는 작은 창만 원형으로 되어 있다. 이 저택의 장식이라고는 오로지 그것과 벽돌을 타고 오른 넝쿨뿐이다. 그마저도 한 세기가 너끈히 지난 낡은 저택의 상징처럼 여겨져서, 고개를 낫 모양으로 기울이고 보노라면 그저 벽돌에 이끼 스민 모양새가 되고 만다. 그것도 아주 축축한 이끼 말이다.


수수하다 못해 어딘가 으스스하고 궁색하기까지 한 대저택을 터전으로 사는데도 베클레아 가의 귀족들은 위풍당당하다. 얼핏 호기롭기까지 하다. 그들은 고개 숙이지 않으면서 흔쾌히 사과하는 법을 알며, 우아한 음울함으로 상대가 자신의 기분에 호응하도록 부추길 줄 안다. 때로 오만의 절제란 특별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라 저택의 사용인들은 모두 세상 하나뿐인 그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우리의 주인이신 미스터 베클레아와 미세스 베클레아를 말이다.


대문까지는 걸어서 한참. 한눈팔지 않고 큰길만 따라가도 저택 종을 울리려면 머리카락을 적셔야 한다. 태양이 거들먹대는 여름이 오면 더욱 심해진다. 머리칼과 함께 등줄기를 흠뻑 적시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는 앞뜰엔 아기자기한 울타리가 서 있다. 그건 우리 정원사의 자랑으로 온통 순백이며, 때 타는 법이 없다. 또한 울타리 안쪽의 납작한 돌길 옆으로는 개울이 졸졸졸 흐른다. 그 아름다운 물줄기는 곧장 숲으로 이어지는데, 우리가 베클레아 숲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덤 숲’이라고 부르는 울창한 나무의 군집이 그것이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들쑥날쑥 고개를 내민 숲은 어찌나 울창하고 생명력으로 가득한지 버섯이나 열매라도 따고자 들어가면, 다섯 손가락을 쫙 펼친 나뭇잎이 뺨을 감싸 안다가도 돌변하여 할퀴고는 했다. 내 뺨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이제는 점이 되어 남은 자국이 바로 나뭇잎에 찍힌 어이없는 상처다. 어머니는 상처 난 광대를 어루만지며 신신당부했다. 버섯을 이만큼이나 따온 건 잘했지만, 앞으로는 되도록 들어가지 말아라. 사용인들은 숲을 무서워한다. 기이하고, 아주 철학적인 이야기가 숲에 얽혀있다. 그 사연이 우리가 아무 죄 없는 푸름을 <무덤 숲>이라는 고독한 이름으로 부르게 된 이유다.


이 영지에는 규칙이 있다. 영지란 숲을 아울러 베클레아 대저택이 위용을 뻗치는 모든 곳을 말하는데, 이 규칙이라는 것이 참으로 골때리면서 심오하다. 세상의 모든 것에 <총량>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는 물건이나 음식, 돈과 같은 셀 수 있는 종류는 물론이요, 애정이나 시간 등의 추상적인 개념에도 통용되는 규칙이다. 총량이란 절대적인 값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콩이 세 쪽 있을 때 한 사람이 두 쪽을 먹는다면 다음 사람은 한쪽뿐 먹지 못한다는 뜻이며, 우리에게 일주일이란 시간이 주어졌을 때 누군가 좋아하는 이와 닷새를 함께 한다면, 두 사람이 또 다른 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이틀 남게 된다는 것이다. 애정이나 행복, 슬픔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에도 총량이 있어서 누군가 세상이 무너질 듯 슬플 땐, 다른 누군가는 반대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다는 것. 한 사람이 행복을 취한 만큼 행복의 양은 비어버리지만 반대로 슬픔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이 영지는 총량의 규칙을 절대적으로 따른다. 외지인이 듣는다면 우리를 몽상가 내지는 궤변 덩어리의 철학자 집단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규칙은 사람의 힘으로 유지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 어떤 힘도 쓰고 있지 않다. 다만 <숲>의 의지일 따름이다.


“시나.”


베클레아 도련님이 숲으로 나를 불렀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젊은 도련님은 겨울철 시냇물을 뒤집어쓴 듯 하이얀 은빛 머리카락에, 창백한 피부를 해다가는, 마른 광대만 발갛게 상기시킨 채였다. 그는 몹시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빛냈다. 동시에 베클레아 가문의 귀족다운 우아한 음울함을 풍겼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빛나는 자랑은 짙고 붉은 눈이다. 그는 영국인으로서는 좀처럼 가지기 어려운, 오히려 아일랜드나 저 멀리 루마니아의 요정 혈통에서나 알음알음 내려올 법한 그런 눈을 하고서 사람을 빤히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 오래 기다린 후에 수확한 적색 열매와 같은 색으로 바라볼 때마다 얼마나 긴장되는지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아니, 모르는 체일 수도 있다. 그는 이 가문의 늦둥이이자, 독자로 태어났다. 베클레아 부부의 아들을 향한 집념은 모르는 이가 없다. 당연히 쩔쩔매는 일이나 불리한 위치에 선다거나, 손바닥이 흥건하도록 긴장하는 경험은 겪어본 적 없음이 옳다. 그러나 도련님은 잔뜩 얼어붙어서 내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이 도련님은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독, 비참함 따위를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이 못내 서럽다.


입을 벌린 채 잠시간 시간이 흘렀다. 그를 무어라고 부르는 게 좋은지, 한참 고민했다.


“그래, 레베카.”


그가 크게 기뻐했다. 뺨의 홍조도 조금 더 깊어졌다. 숲이 그를 따라 까르르 웃었다. 한차례 바람이 불었다. 모든 나뭇잎과 나뭇가지, 그리고 부드러운 풀이 아래로 누웠다. 우리의 도련님, 그러니까 레베카는 자연에 감싸인 채 몹시도 행복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제 반려가 되어주실래요.”


그의 분위기는 극에 달해 있었다. 신비롭고 투명한 낯, 붉은 눈은 더더욱 깊어져 예민하면서 그윽한 감미로움 속으로 사람을 퐁당 빠트렸다. 목소리는 또 어떠한가. 좀 전에 지나간 바람도 이보다 섬세할 순 없으리라. 바짝 긴장한 두 손을 꾸물거렸다. 이 모든 황홀함의 유일한 단점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큼 내가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종의 아들을 사랑하는 귀족이 어디 있는가. 그것도 한창 젊고 아름다운 자신과 달리, 낙하하는 태양만치 구겨져 저물어가는 하인을 말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레베카가 기뻐하고, 행복한 만큼 누군가는 비어버린 행복 대신 슬픔과 비극을 영혼 가득 채웠을 게 뻔했다. 그 비극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나는 정확히 알고 있다.


가엾은 베클레아 부부. 이제 베클레아 부부가 제 아들을, 무덤 숲의 주인을, 저택의 영혼을 대신하여 슬픔을 짊어질 차례였다. 그리고 그의 사랑에 긍정하는 순간 나 또한 입으로 푸른 죄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 허나,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선고를 각오해왔다. 말의 죄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죄가 아니라, 레베카의 미소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이리라.


이제 셋을 세면 나는 그의 부름에 응답한다.


숨을 내쉰다.

또 한 번 숨을 내쉬고,

들이마신다….




< Dear, Pleasure >




1.



내가 성년을 막 앞두었을 무렵, 저택은 아기 물건으로 넘쳐났다.

당시 베클레아 부부를 비롯한 저택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아기>였다. 베클레아 부부는 아름다운 헤이즐넛 색 눈을 한 건강한 사내아이를 간절히 바랐는데, 식을 올린 지 몇 해가 되도록 잠잠하여 그 집념만 빚더미처럼 늘어난 참이었다. 그들은 소식 없는 아이 대신 놀이방과 침실을 먼저 꾸몄다. 아버지를 닮아 섬세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공예품과 화려한 모빌을 두고, 어머니를 닮아 온화하면서 우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크림색의 흔들 요람을 창문 앞에 마련했다. 특히나 유니콘 뿔이 인상적인 목마는 주문 제작이 잘못 들어간 건지 아기가 타기엔 꽤 커다래서 곡선이 매끄러운 훌륭한 안장에 한 번만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다. 그러니까 유아용이 아니라, 딱 나 같은 소년을 위해 만들어진 그런 종마 같았던 거다.


간혹 멍해질 때면 시선은 자연히 그곳을 향했다. 메이드인 엠마가 각설탕을 담아 둔 유리 케이스에 관심 가지는 것처럼, 손버릇 나쁜 휠러 삼촌이 주인님의 진주 반지를 탐내는 것처럼 나의 영혼도 홀린 듯 놀이방 문틈 새를 서성거렸다. 그럼 다른 어른들이 나의 영혼을 남루한 일터로 돌려놓았다. 나쁜 물이 들었구나. 라거나, 좋은 주인을 만나 배가 불렀구나.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맹세컨대, 그건 훔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함께할 놀이 상대를 아기만큼 원했다. 설령 살아있지 않은 나무로 된 말이라고 해도 말이다.


저택엔 어린아이가 없다. 입주 시종의 자식이 있는 게 당연한데도 이 저택의 막내는 나였고, 다음이라고 해봐야 혼기를 훌쩍 넘긴 노처녀 엠마였다. 무결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저택의 고요함이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데서 온다는 건 모두가 알면서도 쉬쉬하는 사실이었다.


미세스 베클레아 때문이다. 그녀는 우아하게 음울한 사람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비련의 여인이다. 아기를 향한 열망으로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그녀는 결국 모르는 어린애 얼굴만 봐도 울음을 터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다정다감한 미스터 베클레아가 부인을 달래고자 저택의 어린아이를 몽땅 치워버리게 된 것이다.


아기방을 꾸미기 시작할 즈음 어린 콩 솎아내기가 시작됐다. 그 커트라인에 딱 내가 걸렸다. 나의 부모는 아들이 몇 달 후면 성년이 되니 부디 애를 내쫓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 나는 발육이 좋은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는 훌륭한 남성상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여 나는 성실함과 체력으로 내가 ‘청년’임을 입증해야 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일했다. 주인님께 미움받지 않기 위해 부러 인적 드문 길만 찾아다니며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 했다. 어린애를 품에 안은 시종이 모두 떠났다. 그 자리는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졌다. 당연히 떠나는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지도 못했다. 기어코 저택의 미성년이라곤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무척이나 쓸쓸한 여름이었다.

외로움이 발목을 물던 한낮이었다. 빼내지 못한 독은 점점 차올라 뱃속에 우물을 쌓고 똬리를 틀었다. 독을 길어다 버리기엔 도르래를 내려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우물 밖이 아니라 우물 안에 있는 까닭이었다. 지긋지긋한 고립감이 한낮의 뙤약볕처럼 가혹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복사뼈 부근에서 찰랑거리는 맹독이 익숙해질 무렵, 우리 영지에도 선선한 가을이 왔다.




2.



나는 저택에서 거의 없는 존재였으므로 온갖 잡일을 나서서 도맡아야 했다. 주로 청소와 굴뚝 관리를 담당했고,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도왔다. 가끔 마구간에서 볏짚 까는 일을 돕는가 하면, 울타리 보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여러모로 특출난 재주는 없지만, 이것저것 다 할 줄 아는 애매한 시종으로 자라버린 것이다.


하루는 저녁 준비를 시작한 부엌에서 곡소리가 들렸다. 손을 닦고 부랴부랴 달려갔더니 어머니가 울상이었다. 저녁 만찬에 올리려고 준비해둔 버섯이 죄 벌레 먹어 도통 쓸 수 없게 되었다며 어머니는 발만 동동 굴러대고 있었다. 그것참 큰일이었다. 둥글둥글하게 다듬어 부드럽게 익힌 버섯 스튜는 미세스 베클레아가 예민할 때 특효약처럼 처방하는 요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민했다. 열어둔 부엌 창문으로 숲 바람이 들었다. 솨아, 하며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시름 가득한 공기를 파헤쳤다. 바람 소리가 하도 커서 나는 방법을 쥐어짜는 와중에도 바람이 하도 거세서 나무 밑동까지 몽땅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시답잖은 상상에 빠져버렸다. 그러다 생각해냈다. 영지 한 편은 완전한 숲. 때마침 가을이고 하니, 숲에서 식용 버섯을 캐는 게 더 낫지 않나 싶었다. 당장 채비했다. 낡은 헝겊 주머니를 둘러매고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그 누구에게도 숲으로 간다고 말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언제나 숲의 무서움을 알라고 일렀다.


<무덤 숲>에 얽힌 전설이 있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총량의 법칙을 집행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바로 무덤 숲의 주인 <레베카 경>이다. 레베카 경. 이야기 속 레베카 경은 내 나이 또래의 젊은 소년이지만, 우리는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경’이라고 부른다. 아주 먼 옛날, 본래 이곳은 레베카 경과 그의 가족들이 겨울마다 쉬러 오는 별장이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숲이 있고, 정면으로는 개울과 들판이 조화를 이루는 이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그들 역시 무척이나 사랑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아꼈으며, 온건하고 선량하여 근방 모든 이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았다. 사랑스러운 이웃과 단란한 가정, 부족함 없는 생활을 영위하며 그들의 영혼도 배불리 살쪄갔으나, 안타깝게도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큰 전쟁이 일었다. 군대는 신병을 모집했다. 오 남매의 유일한 아들이자 첫째로 태어난 레베카 경은 의무와 사명을 안고 전쟁터로 향했다. 몇 해가 흘렀다. 수도로 가지 못하고 별장에 묶인 레베카 경의 가족들은 불우한 시대에도 서로를 의지하며 장남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 별장에 큰불이 일었다. 이 부분에 와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이 각기 달랐다. 아버지는 낙오된 적군이 함께 죽을 요량으로 불을 지른 거라고 했고, 어머니는 오랜 전쟁으로 낡은 저택을 보수하지 못한 까닭에 화재 사고가 인 것이라고 했다. 나는 후자의 의견이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저택은 활활 불타버렸다. 석조 저택이라 외관은 멀쩡했지만, 가구가 모두 목재였던 탓에 그들 가족은 도망치지 못하고 불길에 휘말렸다. 악마들의 습격이라도 받은 양 끔찍한 광경이었다. 레베카 경은 뒤늦게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그을린 석조 저택과 바싹 타버린 가족들을 본 레베카 경은 슬프게 울었다. 세상 모든 슬픔이 그와 함께했다. 세상 모든 불운이 그를 사랑했다. 결국 모든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레베카 경은 비틀거리며 숲으로 사라졌다. 그가 숲을 지나 새로운 곳으로 갔는지, 아니면 그대로 굶어 죽거나, 짐승의 밥이 되었는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숲으로 갔다. 그날 이후, 총량의 법칙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라는 문장이 전설로 남아 이어질 따름이었다.


영지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밤마다 그들 가족의 유령이 슬피 운다는 소문이었다. 이 광대한 영지를 헐값에 거머쥘 기회인데도 대부호들은 쉽사리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주를 받을까 봐 두렵다나. 그렇게 오래도록 빈 땅으로 남아있던 영지를 사들인 게 바로 베클레아 부부였다. 그들은 금기를 깨고 영지를 몽땅 사들였다. 그리고 석조 저택을 헐고, 붉은 벽돌집을 새로이 쌓았다.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베클레아 가문에 행운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풍작과 호황이 이어졌다. 저택의 규모는 날로 커져서 마침내 현재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그렇게 완공된 저택에서의 첫날 밤. 문제는 바로 드러났다.


어쩐 일로 잠을 설치게 된 미스터 베클레아는 우연히 창문으로 숲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새빨간 눈을 한 사내가 초입에 우두커니 서 있지 않던가. 심지어 그 시절의 군복을 걸친 채였다. 그는 미스터 베클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레베카 경이 확실했다.

현명한 미스터 베클레아는 사용인들에게 되도록 숲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는 것도, 그들 가족이 슬픔을 모두 짊어진 덕일지도 모른다며 한숨지었다. 모두 그 말을 믿었다. 새로운 소문이 빚어졌다. 베클레아 부부에게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게 레베카 경의 동생이 많았던 까닭 아니겠냐며 다들 혀를 쯧쯧 찼다. 총량의 법칙은 자연스레 우리의 삶이 녹아들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숲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행복한 만큼, 불행한 레베카 경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고. 그리고 그 불행은 주인들의 입을 통해 이루어지리라고 어른들은 짐작했다.


그러나 나의 철학은 달랐다. 나는 유령과 저주를 믿지 않았다. 그저 길이 없는 울창한 숲을 무작정 걷다 보면 미아가 되기 쉬우므로 그런 전설을 만들어낸 거라고 여겼다. 한낮에도 음침한 숲이 거대하게 펼쳐졌다. 나는 헝겊 주머니에서 여러 장의 손수건을 꺼냈다. 초입에 서 있는 나뭇가지에 노란 걸 매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십 걸음마다 하나씩 손수건이 걸렸다. 빽빽하게 선 나무들이 성을 지키는 기사처럼 나뭇가지를 양날 검 삼아 목에 들이밀었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숲이 지닌 어둠은 그냥 어둠일 뿐. 어둠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므로 두려움은 무연했다. 침착하게 전진했다. 손수건을 여섯 즈음 매달았을까. 눅눅한 흙 위로 빼꼼히 모자를 내민 버섯이 보였다. 함빡 웃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



헝겊 주머니가 반쯤 찼다. 예상컨대 이정도 양이면 충분하다 못해 남을 터였다. 무게감이 생긴 주머니를 만족스럽게 흔들었다. 이제 손수건을 따라 돌아갈 시간이었다. 희미하게 들이치는 햇살이 서서히 약해지고 있었다.


그 순간, 깊은 숲으로 향하는 어둠 속에서 싸늘한 기운이 흘러왔다. 한기가 얇은 겉옷을 파고들었다. 두 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돌아섰다. 가을 저녁의 날씨는 쌀쌀하다. 어둠은 그냥 어둠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한 쌍의 눈이라도 본 게 아니라면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조금도….

헛숨을 삼켰다. 너무 깜짝 놀라 딸꾹질까지도 꿀꺽 삼켜버렸다. 숲 안쪽에서 눈이 번쩍거렸다. 밝은 눈이 나를 물끄러미 노려보았다. 한참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치가 이어졌다. 눈은 돌연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부랴부랴 따라갔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깜짝 놀라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난 확신이 있었다. 저건 짐승의 눈이 아니다. 분명 사람이었다.


그를 쫓았다. 돌부리에 삐끗하면서, 나뭇잎에 광대를 베여가면서 붉은 눈을 따라갔다. 그는 발소리도 없이 붉은 점 같은 안광만 빛내며 나의 추격을 뿌리쳤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더더욱 깊은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레베카 경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붉은 눈이 그만의 특권도 아닐뿐더러 저택 상황이 상황인 만큼 혹시라도 숨겨 키우는 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컸다. 눈높이가 엇비슷했다. 다 자라지도, 덜 자라지도 않은 애매한 키에 슬쩍 본 마른 손이 그 가설을 뒷받침했다. 머리 위로 하늘이 닫혔다. 나뭇잎 사이로 켜켜이 어둠이 스몄다.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결국 내가 소리쳤다. 더 가면 위험해!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숨이 턱까지 차 그의 모습이 마구 흔들렸다. 난 억지로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밤이 되면 길을 잃기 쉬워. 돌아가자. 창고에라도 숨겨줄게. 눅눅한 손을 뻗었다. 오래 고민할 줄 알았던 그는 생각보다 쉽게 내 손을 잡았다. 어둠 속에서 하얀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덫에 걸린 작은 짐승이 쭉 당겨오듯 그가 터벅터벅 모습을 드러냈다. 놀라울 정도로 손이 찼고,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앳되고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이었다.


그는 이야기 속 레베카 경과 똑 닮아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 이불 둘러쓴 어린애들을 놀리기 위해 그림자 연극으로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버지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투명하고 희멀건 생김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축 처진 눈을 보고 누가 이 애를 무시무시한 숲의 주인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애는 군복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 애가 입을 열었다. 길을 잃었어? 변성기가 지난 목소리인데도 참 부드러운 톤이었다. 너무 깊게 들어오지 않았어? 그는 꼭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말없이 왔던 길을 되짚었다. 손수건 매인 곳과 좀 멀어지긴 했어도 돌아가는 데에 무리는 없을 터였다. 이 숲이 제멋대로 구조를 바꾸지만 않는다면야 그렇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손수건으로 표시해놨어. 걱정하지 마. 금방 도착할 거야. 그리고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근데 춥진 않아? 나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앞서 걷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애의 옷차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아야 했다. 고개가 천천히 돌아가던 참이었다.


너 눈치가 없구나. 부러진 나뭇가지만 보고 가.


그 애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손을 잡고 있었는데 뒤를 돌아보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소름이 쫙 끼쳤다. 뒷덜미가 쭈뼛 당겨 올라가고, 머리 꼭대기에서 얼얼한 감각이 벌레처럼 득실거렸다. 또 바람이 불었다. 오싹한 한기가 등을 떠밀었다. 그게 신호였다. 나는 헝겊 주머니를 꽉 끌어안고 달렸다. 신기하게도 숲 안쪽을 향해 달릴 때는 시도 때도 없이 발끝에 걸리던 나무뿌리나 돌 따위가 돌아갈 적에는 하나도 밟히지 않았다. 손수건이 있는 얕은 숲으로 돌아왔다. 나는 숨을 헉헉거렸다. 저택으로 돌아가면서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부러진 나뭇가지가 출구를 향해 산재해 있는 걸 나는 보고 말았다. 마치 돌아갈 길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숲은 그 애의 말대로 변해 있었다. 숲이 고분고분 구조를 바꾸어 주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3.



베인 광대가 욱신욱신했다. 이불을 코끝까지 당겨 올렸는데도 몹시 추웠다. 부실한 창문이 마구 덜컹거리는 걸로 보아 조만간 겨울 이불을 깔아야 할 것 같았다. 일찌감치 잠든 부모님의 코골이를 들으며 나는 눈을 말똥거렸다.


그런 일을 겪고도 내 머릿속엔 온통 그 애 생각뿐이었다. 정말 유령일까? 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는걸. 유령이라기엔 오히려 요정처럼 생겼던데. 하지만 기왕이면 사람이 좋겠어. 아니, 아니, 참. 아니지. 사람이면 이 추위를 견디기 어려울 텐데. 오지 않는 잠을 뒤로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낡은 침대가 삐걱거리며 복통을 호소했다.

얼어 죽는 거 아니야? 나는 침대의 배 위에 올라앉아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새카만 어둠은 내 얼굴만 고스란히 유리창에 비쳐 보이도록 했다. 하는 수 없었다. 바람 소리가 잠잠해진 틈을 타 창문을 바깥으로 밀었다. 어둠 저 멀리 숲의 초입이 보였다. 추운 날씨 탓에 그곳은 더더욱 오싹한 분위기를 풍겼다. 괜스레 어깨가 바짝 당겨 올라갔다. 주인님의 이야기가 생각난 탓이었다.

순간 저녁에 보았던 붉은 눈이 뇌를 쿡 파고들었다. 죽음을 경고하는 듯한 그 빨간 점이 별안간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창틀을 붙잡고,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흐려진 초점을 바로잡았다. 눈을 연신 깜빡거렸다. 그리고 둥글게 떴다. 숲 초입에 그 애가 있었다. 난 창문 밖으로 몸을 불쑥 내밀었다. 어머니가 보았다면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냐며 등짝을 마구 두드렸을 테다. 하지만 우리 방은 1층이다. 위험할 건 하나도 없었다. 다만 그 애가 뭘 하는지 보기엔 너무 낮은 높이였다. 눈을 가늘게 떴다. 그제야 어둠 속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 애가 발끝으로 흙을 툭툭 걷어찼다. 창틀을 훌쩍 넘어 그에게 달려갔다. 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가 내게 외롭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도망칠까 봐 손부터 잡았다. 싫지 않다는 눈치였다. 그래도 눈살을 찌푸리더라. 생긴 만큼 뾰족한 구석이 있었다. 그게 가시나 바늘만큼 뾰족하지 못할 뿐.


그가 말했다. 이 시간은 추운데. 그때 나는 몹시 들떠 있었다. 또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게 간만이고, 또 그가 내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단박에 좋은 기분을 느꼈다.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하나도 안 추워. 그보다 네 옷이 더 얇지 않아? 겉옷을 벗어주고 싶었으나, 급하게 나온 터라 잠옷 한 장 덜렁 걸친 채였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그를 잡아끌었다. 안이 그래도 따뜻할 거야. 나는 그가 또 묘한 말만 남기고 사라질까 봐 잔뜩 긴장했다. 다 자느라 아무도 없어! 열심히 변명하는 나를 그 애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다행히 순순히 끌려왔다. 그는 사뿐사뿐 걸었다. 정말이지 생긴 대로 굴었다.


내 이름 궁금하지 않아?

마땅한 장소를 찾다 보니 창고밖에 없었다. 창고 벽난로에 불을 지피는 차에 그 애가 내게 물었다. 작은 불씨가 피어오르자, 그 애의 흰 얼굴에도 화사한 색이 그슬렸다. 음, 레베카 경? 내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소리였다. 마구 웃으며 꽁꽁 언 손을 녹였다. 아늑한 훈기가 차오르고 있음에도 그 애는 긴장을 풀지 않고 침묵했다. 그러자니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설마 정말 레베카 경이야? 침묵을 깬 건 내 쪽이었다. 우리는 잠시간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벽난로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냥 레베카라고 불러. 거짓말, 군복을 입지 않았잖아. 다음에 입고 올게. 옷도 바꿔 입어? 유령은 옷도 못 바꿔 입어? 너 정말 유령 맞아? 입을 떡 벌렸다. 레베카가 한심하다는 듯 눈썹을 까닥여서 괜히 뒷덜미가 홧홧해졌다. 이 이상 실수는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바보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나는 시네드 무어야. 다들 그냥 시나라고 불러. 레베카가 대답했다. 어, 그래. 무어 군.


그날부터 유령을 믿었다. 친구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대관절 뭘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밤의 창고에서 만났다. 저녁 식탁에서 몰래 빼돌린 빵을 나눠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겨울이 말을 타고 들판을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밖에 나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 덕에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레베카는 숲에서 얻을 수 있는 식자재와 글 쓰는 법을 알려주었고, 나는 그에게 저택에서 있었던 일이나 말 가꾸는 법 따위를 돌려주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사실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유령이라고 만질 수 없는 건 아니라는 점과 그럼에도 온기나 심장 박동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레베카는 정말 유령이었다. 배고픔과 졸림 같은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가슴에 귀를 대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빵과 벽난로 보기를 돌 보듯 했다. 빵을 몰래 챙겨온 내게 희한하네, 하고 말하기만 했다.



그는 부유하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걸 더 좋아했다. 레베카에게선 어딘가에 얽매인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어른들이 깰까 봐 창고에서도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나와 달리 그는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나는 그를 따랐다. 창고에서 마구간으로, 마구간에서 2층 복도로, 기어이 놀이방까지 입성한 그는 나도 지켜보기만 할 뿐 한 번도 앉아본 적 없는 목마에 턱 앉아 몸을 흔들어댔다. 느슨하게 흔드는 발끝이 멋스럽고, 근사했다.

나를 위해 그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금방 적응했다. 차가운 안장에 앉아 그와 똑같이 몸을 흔들어댔다. 기분이 좋았다. 이 넓은 저택이 우리를 위해 준비된 터전인 양 느껴졌다. 그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설마 처음 타 봐? 레베카가 바닥에 누워 나를 지켜봤다. 더 신기한 경험이 그의 낯에 있었다. 그는 나보다 더 행복하다는 듯 뺨을 붉혔다. 혈색 없는 얼굴 위로 처음 홍조가 돋아난 것이다. 그걸 어떤 표정이라고 표현하기 무진장 곤란하고, 버거워서 나는 바보같이 우뚝 목마를 멈춰 세울 뿐이었다.


매일 밤 레베카와 놀러 다니느라 눈꺼풀이 묵직했다. 마구간 청소를 하다가 별안간 울타리에 머리를 처박기도 여러 번. 마구간지기가 밤마다 뭘 하느냐며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침대에 손님이라도 드나, 응? 손등으로 슥 침을 닦았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겨울이 들판 위로 활개를 쳤다. 벽돌을 뚫고 찬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날씨가 되면 어떤 침대는 꽉 찼고, 어떤 침대는 아예 텅 비기 마련이다.


내 침대는 꽉 차는 쪽이었다. 어제는 레베카가 내 방 창문을 검지로 똑똑 두드렸다. 얼른 그 애를 안고 침대로 숨어들었다. 우리는 이불 한 장을 덮고 어둠 속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속닥거렸다. 이불 위로 새벽의 밝음이 스며들어왔다. 서로의 얼굴이 훤히 보일 즈음이면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레베카는 아침이 오면 점점 투명하게 변하다가 사라져 버렸다. 그가 무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사라지는 게 레베카에겐 당연한 일이라지만, 내겐 아니었다. 나는 계속 그의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 내가 걱정됐는지 레베카가 물었다.


- 너….


이번 해가 지나면 성년이던가?

해가 뉘엿거렸다. 저택 굴뚝에서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저녁 시간이었다. 마구간지기가 포크 삽을 세우며 물었다. 레베카가 했던 말과 같았다. 역광을 맞아 새까맣게 점멸하는 그를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마구간지기가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요정들과 작별 인사는 했고? 뜬금없는 소리에 눈이 가로로 굴렀다. 나는 더러운 물 양동이를 비우며 대답했다. 그래야 하나요? 그가 느긋하게 하품하며 대수롭잖은 투로 말했다. 요정은 어린애들 눈에만 보이니까. 우리는 나란히 걸어 저녁 식탁 앞으로 갔다. 스푼을 입에 물고 생각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을 때 레베카는 이렇게 대답했다.


- 그렇구나.


그는 어쩐지 공허해 보였다. 나는 눈치가 별로 좋지 않은데도 어쩐지 대답해버렸다.


- 그렇구나. 얼마 안 남은 거지?


유령과 쭉 함께할 수는 없는 거라고, 무의식적으로 계속 생각해왔던 것 같다.



4.



눈이 펑펑 쏟아지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눈발이 녹다가, 얼어붙기를 반복했다. 산책하러 나간 주인님이 빙판에서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크게 앓아누우시는 바람에 저택의 공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눈에 파묻힌 영지는 적막하기 그지없다. 고요는 말발굽 소리도 허락하지 않았다. 의사를 모시러 나갈 수가 없어서 다들 초비상 상태였다. 안주인께서도 단단히 날이 섰다. 애도 없이 과부가 될 순 없다며 흐느끼는 걸 엠마가 들었다고 했다. 오늘도 실컷 눈이 왔다. 근래 잦은 건 눈 소식만이 아니다. 이상하게 건강하던 주인님의 병치레가 부쩍 잦아졌다. 괜히 나도 예민해졌다. 오래된 신화나 소문은 믿지 않는다. 나는 레베카만 믿는다. 그래서일까? 발갛게 상기된 레베카의 그 얼굴만 계속 떠올랐다. 주인님께 변고가 생기기 시작한 게 바로 그 무렵이다.


불행이 들불처럼 퍼져나간 밤. 레베카가 내 방 창문을 두드렸다. 그는 별스럽게 군복 차림이었다. 아주 오래된 양식의 군복이었다. 신기해서 눈을 비비며 가만히 쳐다봤다. 레베카가 창틀에 거꾸로 매달려 말했다. 눈이 정말 예쁘게 내렸어. 뒤집힌 그의 눈코입을 보며 물었다. 웬일로 군복을 입었어? 음, 추워서. 추위 안 타면서. 레베카가 눈을 찡긋거리며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시나, 지붕으로 안 올라올래?


나는 안 된다고 했다. 저택 분위기가 안 좋아서, 오늘은 곤란하다고. 레베카는 한사코 괜찮다며 손을 내밀었다. 내가 좋아, 네 주인이 좋아? 레베카는 남 괴롭히는 걸 좋아한다. 악의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남이 곤혹스러워하는 걸 보고 기뻐하고는 한다. 네 주인이 내 알 바야? 나는 항복했다. 레베카의 손을 잡고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가장 두꺼운 겉옷을 잠옷 위에 껴입었는데도 이가 딱딱 부딪쳤다. 레베카가 사뿐거리며 앞서 걸었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따라갔다. 발소리도 조심했다. 레베카는 어차피 쥐가 지나가는 건 줄로 알 거라며 성큼성큼 걸어도 된다고 했다. 일리 있었다. 훌쩍 뛰어 그를 따라갔다. 부쩍 가까워진 밤하늘이 맑았다. 총총 박힌 별도 무척 밝았다. 하늘을 가리던 구름이 모두 땅 위로 내려온 듯했다. 레베카가 지붕 한쪽에 주저앉았다. 그의 시야에 숲이 있었다. 하얗게 물든 숲이 별세상처럼 반짝거렸다. 아기 놀이방을 처음 봤을 때처럼 눈이 크게 뜨였다. 바람에 몸을 휘청거리자 레베카가 나를 주저앉혔다. 그가 내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추워서 그래. 묻지 않았는데, 레베카는 알아서 변명을 중얼거렸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까닭일까. 너무 추워서 코끝이 찡해 눈물이 날 것 같은 까닭일까. 나는 문득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레베카가 진짜 추위를 타고, 배고픔을 느낀다면 내가 끌어안았을 때 그의 온기가 되고, 포만감이 되어 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레베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데, 멀거니 눈뜬 채 지금의 시대까지 홀로 버텨온 것이었다. 나는 그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내가 아는 고독은 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해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무심코 말했다.


- 널 정말로 따뜻하게 할 방법이 없을까?


나는 유령을 모른다. 사실 레베카를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다. 목소리는 무기력하고, 떨림이 묻어났다. 행복하게 파묻혀 있던 레베카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는 또, 내가 뭐라도 실수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 궁금해?


레베카의 붉은 눈이 선명했다. 하늘은 가깝고, 대지는 하얗고, 어둠이 밝아서. 그의 말이 유독 따스하게 들렸다. 나는 유령을 모른다. 레베카를 잘 안다고 할 수도 없다. 기왕 친구라면 잘 아는 게 좋지 않은가? 뭐라도 해주고 싶은 이 마음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듯 굴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그가 지금 처음으로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며 되묻고 있었다. 나는 조금 울컥한 시선으로 그를 봤다.


- 그래, 내가 옆에 있어도 네가 외롭고, 힘들까 봐 걱정돼.


그러자 레베카가 뺨을 붉히며 웃었다. 혈색 없는 얼굴 위로 홍조가 돋아났다. 그때처럼. 그걸 어떤 표정이라고 표현하기 무진장 곤란하고, 버거웠다. 그래도 이젠 알 것 같았다. 그건 기쁨이다. 레베카는 기쁨에 겨워 발끝을 꿈지럭거렸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단추가 짤랑거리고, 견장이 움찔거렸다. 슬픔뿐 아니라 기쁨도 전염되는 모양이다. 꼭 살아있는 듯한 반응에 내 마음도 공연히 설렜다. 기뻤다. 레베카가 그토록 기뻐한다는 게 기뻤다. 그의 기쁨이 곧 내 것인 양 그랬다.


레베카가 마저 말했다.


- 네가 어른이 되어도 헤어지지 않을 방법이 있어.

- 우리 헤어져?


내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리고 뒤늦게 더 깜짝 놀라 또 물었다.


- 나랑 헤어지지 않으면 네가 행복해?


레베카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는 대체로 늘 그런 표정이라 나는 늘! 확신하지 못했다. 그에게도 열정과 애정이 있는 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니 더 간절해졌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붙잡아야 했다.


- 아무렴 어, 좋은 거지?


칼바람에 덜덜 떨었다. 레베카가 나를 더욱 당겨 안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 네가 나랑 헤어지는 게 싫다면 좋은 방법이지. 네가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 난 네가 행복하면 행복해. 널 좋아하니까.


그는 허를 찔린 듯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추웠지만, 하나도 춥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떨지 않으려고 나도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우리는 서로 딱딱한 몸을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어벙하게 굳은 그를 보챘다.


- 그래서 대체 무슨 방법인데?



5.



봄이 낯을 가리던 어느 날, 저택에 희소식이 생겼다.


“애가 맞대요!”


드디어 미세스 베클레아의 배에 아기가 들어선 것이다. 시종들도 크게 기뻐하며 마차에 올라타려는 주치의를 붙들고 이것저것 물었다. 정말 아기죠? 드디어 애가 태어나는 거죠! 하느님, 감사합니다! 원체 주인을 하늘같이 모시던 이들이었다. 이후로 미세스 베클레아는 제 발로 걸어 다니질 못했다. 다들 미세스 베클레아를 붕 들고 다녔다. 그녀는 가장 먼저 나를 찾았는데, 애가 생기기 전에는 본체만체하더니 막상 아이가 생기니 놀이 상대가 필요한 듯했다. 두 손으로 배를 문지르던 그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할 줄 아는 놀이가 있니? 물음에 곰곰이 생각했다. 레베카가 알려준 적 있었다. 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체스요. 그녀가 의외라는 듯 어머, 탄성을 지르며 좀 더 자세히 질문했다. 퍼즐 맞추는 법은 아니? 네, 조금 할 줄 알아요. 카드놀이도 할 줄 알고? 그것도 조금이요. 세상에! 그래도 글은 못 읽겠지? 그녀가 부끄럽다는 얼굴로 웃었다.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역시 레베카가 알려준 것이었다.


“동화책 정도는 읽을 줄 압니다.”


나는 애가 태어나기도 전에 놀이 상대로 낙점되었다. 드디어 이 저택에서 나만의 일이 생긴 것이다. 아기는 열 달을 조금 못 채우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몹시 추운 겨울날, 미세스 베클레아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주님께서 두 생명을 거둘 마음은 없으셨는지 산파가 도착하고 나서야 매서운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나는 부엌 복도를 서성이며 기도했다. 서로 다른 기도를 올렸을 게 분명하다. 나는 답잖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날카로운 눈보라를 뚫고 우렁찬 아기 소리가 들렸다. 깨끗한 물을 옮기는 엠마를 졸랐다. 나는 물 양동이를 대신 들어주는 조건으로 산모 방에 함께 들어설 수 있었다. 미세스 베클레아는 찌푸린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숨이 괴로워 보이지 않아서 나는 안도했다. 엠마가 물수건으로 미세스의 얼굴을 닦았다. 나도 마른 수건을 적시며 주변을 흘긋거렸다. 갓 태어난 아기는 주인님의 품에 안겨 있었다. 울음을 그치고 칭얼거리기 시작한 아기는 아직 양막에 감싸여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건강한 사내애였다. 그 애는 신선한 숨을 들이마시며 두 팔과 다리를 힘껏 휘저었다.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그 힘찬 팔과 다리로 온 저택을 쏘다닐 것이다. 경이로움이 온몸의 솜털을 일으켜 세웠다. 애는 정말이지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이가 새로 태어난 아기의 밝은 미래를 기도하고, 축복했다. 그랬었다. 애가 번쩍, 눈을 뜨기 전까지는.


저택이 발칵 뒤집혔다. 애가 태어나고 몇 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인님이 던진 크리스탈 재떨이가 창문을 깨고, 화단에 떨어졌다. 급히 커튼을 쳤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눈보라가 방 안으로 들이쳤다. 곤히 잠들어 있던 산모가 몸을 떨며 깨어났다. 산파가 절대 안정을 위해 도와달라고 사정했지만, 이미 주인님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애를 내려놓을 정신은 있었다. 나는 기민하게 주인님께서 내려놓은 아기를 받아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부가 애의 출신에 대해 따지는 동안 나는 몸을 들썩이며 애를 봤다. 방 안의 시종들이 모두 달라붙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갓 태어난 아기의 눈이 새빨갛게 빛났다. 이 저택에 붉은 눈을 한 사람이라곤 한 명도 없는데 말이다. 모두가 채찍 맞은 말처럼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경악했다. 나는 아기가 그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고개 숙였다. 그리고 동그란 이마에 여러 차례 키스하며 속삭였다.


“레베카.”


레베카,

레베카,

레베카….




***



베클레아 부부는 삽시간에 불행해졌다. 저택 시종들도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행복한 이가 없었다. 아기로부터 시작된 평화가 아기 때문에 파멸에 이른 것이다. 다행히 부부의 지인 가운데 붉은 눈의 신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관계가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번 금이 간 사이는 다시 붙지 못한다. 주의 사랑을 받은 어린아이임에도 그들은 자식을 사랑하지 못했다. 애가 울면 미세스 베클레아도 함께 울었다. 그럼 나는 애를 데리고 놀이방으로 피난했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으므로 복도에서 하는 말을 모두 다 들을 수 있었다.


아기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다들 도련님을 레베카라고 불렀다. 이 영지에서 붉은 눈이라고는 주인님께서 말씀해주신 그 레베카 경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레베카 경이 저택을 돌려받기 위해 다시 태어난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복도를 떠돌고 있었다. 나는 그걸 모두 듣고서도 그냥 흘려 넘겼다. 레베카는 그래서 다시 태어난 게 아니다. 내가 모빌을 흔들자 레베카가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파닥거렸다. 이토록 작고 무르고, 따뜻한, 그리고 상냥한 아기가 또 어디 있을까. 레베카는 약속을 지켰다. 그렇다. 그는 그냥 약속을 지켰을 뿐이다.


레베카는 봄을 함께 맞이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는 나의 성인식을 기다리지 않았고, 하다못해 교회에서 축하를 받기도 전에 성급하게 자취를 감췄다.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진 건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뺨에 입 맞추며 오래도록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레베카는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져도 놀라지 말라고. 절대 네 곁을 떠난 게 아니며, 반드시 돌아오겠노라 약속했다. 나는 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게 어떻게 가능해? 레베카의 말은 아주 단순했다.


- 내가 사라지면, 새로운 애가 태어나겠지.


나는 물었다. 네가 다시 태어나는 게 맞아? 네가 죽고, 그냥 모르는 애가 태어날 수도 있잖아. 총량의 법칙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불안했다. 그냥 레베카를 대가로, 부부의 자식이 태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레베카는 단호했다.


- 네가 알아야 하는 게 두 가지 정도 있어.

- 뭔데?

- 하나는, 태어난 아기가 나라는 확신이 들면 내 귀에 속삭여줘. 레베카, 하고.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영문을 몰라도 나는 그리하겠노라 약속했다. 레베카는 이어서 다음 주의사항을 말했다.


- 내가 다시 태어나면, 네가 모시는 주인이 불행해져. 그래도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아주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총량의 법칙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불안했다. 그는 내게 허락을 받고 있었다. 네 주인의 불행을 대가로, 내가 삶을 되돌려 받아도 되느냐고. 내가 감히 행복해져도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내 말 한마디에 사람의 운명이 달려있으니 당연히 손쉬울 리 없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을 보류할수록 레베카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은 더더욱 짙어져 갔다. 멀리서 새가 날아올랐다. 그렇다는 건 곧 새벽이 온다는 뜻이었다. 그가 또 무연한 얼굴로 사라지는 건 싫었다. 나는 끌어안은 몸을 더욱더 세게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너무 빠르게 뛰어서, 심장이 꼭 두 개 뛰고 있는 듯했다.


- 그래, 괜찮아. 괜찮으니까 부디 내게 돌아와야 해.




6.



레베카는 빠르게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컸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그것일 것이다. 레베카가 처음 걷던 날에 나는 너무 기뻐 마구 손뼉을 쳤다. 애는 내가 있는 곳까지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까르르 웃었다. 그때 와장창 창문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택 창문 너머로 추락하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쿵 소리와 함께 세상이 조용해졌다. 잠깐이었으나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미세스 베클레아가 특히나 총애하는 나이 든 시종이 확실했다. 나는 다시 레베카를 보았고, 온몸으로 그를 숨겼다. 애는 무고한 표정으로 계속 웃고 있었다.


레베카는 사람의 불행 그 자체로 자라났다. 애가 어릴 땐 그나마 나았지만 두 발로 걷고, 반바지를 입고 뛰기 시작하면서 날로 불길한 존재가 되어갔다. 일단 움직인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슬슬 몸을 사렸다. 레베카가 복도에 나타나면 얼른 그를 피했고, 미세스 베클레아는 아예 비명을 지르며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다. 처음엔 얼른 사라지고는 하던 레베카도 나중에는 익숙해졌는지, 한두 마디씩 말을 얹기 시작했다. 하루는 빼빼 마른 하녀가 엉엉 울면서 내게 달려왔다. 왜 우느냐고 묻자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계단을 쓸고 있었어요. 잠시 쉬려고 빗자루를 나무 기둥에 기댔는데요. 레베카 도련님께서, 기둥이 곧 무너질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하시잖아요. 얼마나 오싹해요. 유령이 아니라 악마는 아니겠죠?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기둥은 정말로 무너져 내렸다. 빼빼 마른 하녀가 종아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울었다. 그녀는 입이 무겁지 않았다. 미스터 베클레아가 놀이방으로 뛰쳐 들어왔다. 그는 애 몸을 뒤지더니, 앞으로 이 애를 기쁘게 만들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건 너무나 추상적이고 모호한 명령이었다. 나는 말도 더듬지 않고, 되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요? 아이인데요. 얻어맞은 뺨이 화끈거렸다. 온화한 주인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길길이 날뛰며 그냥 그렇게만 말했다. 기둥을 누가 무너뜨렸겠어? 얘 때문에 우리가 불행해진다고!


하지만 그것도 너무 추상적인 말이었다. 기둥을 레베카가 도끼질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애초에 <우리>란 어디까지인가. 사고 이후 시종들도 모두 레베카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으니, 일단 그들은 <우리>에 포함된 게 확실했다. 하지만 나는 레베카가 두렵지 않았다. 아주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리라.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일이 레베카의 잘못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러므로 레베카를 두려워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조금 다른 종류였다. 그러니 나는 부부가 말하는 우리에 포함되지 못한 셈이다.

그 애는 엄마나, 아빠보다 먼저 내 이름을 말했다. 아무래도 ‘레베카’를 먼저 발음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애가 ‘무어, 무어.’ 하고 말하기에 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무어 군, 하던 레베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그 애에게서 기쁨을 앗아갈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에게서. 불안을 죽이고, 떨림을 가라앉혔다. 잠든 레베카를 쓰다듬으며 덜덜덜 중얼거렸다. 부디 너무 많은 사람이 다치는 일은 없도록 해달라고. 우리는 온건한 기쁨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그렇게 노력해보겠다고. 나는 말하고, 또 말했다. 물론, 이후로도 사람은 계속 다쳤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의 기도에는 대상이 없었다. 누구에게 기도해야 할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애가 말하고, 글을 익히고, 온갖 것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소년이 될 때까지 저택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가 웃으면 모두가 긴장하고는 했다. 그의 기쁨은 곧 저주가 되어 저택을 덮쳤다. 미세스 베클레아는 아예 신경 쇠약에 걸려 앓아누웠다. 그건 단순한 병이었지만, 모두 레베카가 내린 저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루는 어린 레베카가 목마에 앉아 몸을 흔들며 내게 물었다.


“엄마는 늘 아파. 그게 정말 내 탓이야?”


레베카는 하루 백 가지씩, 어떨 때는 그보다 많이 나에게 질문하고는 했다. 저택에서 그의 말 상대는 오직 나뿐이었으므로 나는 모든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우리는 놀이방에 마주 앉아 단출한 식사를 들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입에 으깬 감자를 떠넣으며 고개 저었다.


“그럼 누구 때문인데?”


잠시 고민했다. 대답을 망설이진 않았다.


“아마도. 나 때문일 거야.”


레베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나는 신경 쓰지 말라며 목마를 흔들어주었다. 레베카가 더 자라면 놀이방은 공부방이 될 터였다. 이미 어떻게 책상을 들이고, 장난감을 밀어놓을지 다 생각해두었다. 내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까지 레베카가 더 많이 목마를 탔으면 했다.


아니, 그가 자라도 목마만큼은 치우지 않을 작정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레베카의 몸에 목마가 꽉 끼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그려지고 말았을 때, 나는 나의 결정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주문 제작이 잘못 들어가 아기가 타기엔 조금 커다랗지만, 곡선이 매끄럽고 훌륭해서 열여섯 내지는 열여덟의 소년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그 목마는, 바로 지금의 레베카를 아주 오래도록 기다려온 듯했다. 어쩌면 나보다 더 간절히. 그사이 나는 나이를 먹었고, 목마는 낡았다. 오직 레베카만 젊음으로 반짝거리며 길쭉한 두 다리로 바닥을 디딘 채였다. 그가 목마에 앉아 말했다.


“시나. 그러지 말고. 내일 시간 있냐니까요.”


바보같이, 거기서 가슴이 살살 떨리는 걸 느꼈다.






7.



나는 이 모든 사건이 내 탓에 벌어진 일이라고 확신한다. 이건 레베카의 잘못도 아니고, 지고하신 베클레아 부부의 잘못도 아니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게 잘못일까? 아무것도 믿지 않고 이 영지를 사들인 건. 그건 잘못일까? 그들 모두는 그저 행복하고 싶었던 거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기쁨! 당연하지 않은가. 사람은 기뻐할 때 가장 생명력으로 충만해진다. 영혼이 빛나고, 신선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잘못은 나에게 있다. 내가 모든 상황을 어그러뜨렸기 때문이다. 레베카가 비참하게 죽었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그대로 끝장나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균형을 깨고, 이 영지에 나의 행복을 끼워 넣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레베카가 앳된 소년의 모습을 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각오해오던 것이 있다. 레베카는 아주 오래전 그랬던 것처럼 자주 내 품에서 비비적거렸고, 뺨을 붉혔으며, 입술에 입을 맞춰 달라고 했다. 그는 제법 자라서까지 요람을 썼는데, 어렵게 어렵게 재우고 나서도 내 방까지 터벅터벅 걸어와 굳이 딱딱한 침대를 같이 쓰면 안 되느냐고 사정했다. 어리광이 참 많은 애였다. 부모의 침대로 파고드는 대신 내 품으로 파고들며 악몽을 꿨다고 중얼거리는 애였다. 레베카는 몽롱하게 졸릴 때마다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럼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레베카. 하면서.

그는 태어나기 전의 기억이 없었고, 오직 산 날만큼 부풀린 감정으로 나를 대했다. 레베카는 남들 앞에서는 표정을 잘 감추는 영리한 아이였지만, 내 앞에만 서면 불 앞의 밀랍이 녹아내리듯 흐물흐물해져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시간이 있느냐고 보챌 때마다 계속 나중에, 나중에 하며 선고일을 미뤘다. 그 애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고, 대답 또한 예비한 까닭이다. 그가 사랑한다고 할 때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가슴이 따끔, 따끔 나를 찌르며 보챌 게 뻔했다. 어서 말해. 나도, 레베카. 라고. 어서, 말해.


...

가끔 미세스 베클레아가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죽여 달라며 괴로워할 때는 나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죽을 날이 가까워져 온 이에게는 어떤 통찰력이 생긴다. 미세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데려오라고 악을 썼다. 부부는 이미 오래전에 병들었다. 의사도 시종들도 그 누구도 그들의 병명을 모른다. 나는 그녀의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 숙였다.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선고일이 가까워져 올수록 더 거북스러웠다. 시한부의 얼굴을 보기란 끔찍이도 어려운 것이다. 미세스는 내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숨죽여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불행해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이번의 <우리>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녀가 마른 손으로 내 턱을 쓸어내렸다. 주름진 나의 얼굴에서 그녀는 애절한 슬픔과 안타까움, 괴로움을 더듬었다. 그러자니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결국,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니? 대체 왜 그렇게까지 그 애를 아끼는 거야? 나는 덜덜 떨면서 그녀에게 대답해주었다. 그것이 당신의 부탁이었습니다.


미세스는 울면서 사정했다. 너무 아프군…. 인제 그만 죽고 싶을 만큼….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도 내가 왜 레베카를 싸고도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억울함으로 검게 부풀어 오른 심장을 통통 두드리다가 파리하게 늘어지고 말 것이다. 미세스의 방에서 나오는 길에 나는 다시 레베카를 만났다. 훌쩍 자란 그 애는 이제 완연한 성숙함을 풍기며 눈매 휘었다. 그가 말했다. 시나, 내일은 시간 있을까요? 나도 이제 어른인데…. 나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서 보는 게 좋을까? 놀이방. 아니면, 역시…. 숲?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모든 걸 각오했다. 그와 평생 함께할 결심을 했고, 혼자 잠자리에 들 적이면 쉼 없이 셋을 셌다. 그건 주문이다. 흑마술 따위를 쓰는 마법사처럼 주문을 외는 거다. 셋을 세면 나는 그의 고백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내 상상 속에서 레베카는 예쁘게 웃는다. 그렇게 웃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음에도 레베카는 구체적으로 무구하게, 무결하게, 무고하게 웃는다. 그럼, 그러면, 나는 그걸로 다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나는 그것만을 바랐다.


내 영혼이 가장 춥고 외롭던 시절,

그가 나에게 와준 순간부터 나는 그를 이렇게 부르기로 결정했다.


레베카.

친애하는 나의 기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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