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작 고딕호러
- 2021년 10월 30일
- 1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31일


0.
몇 달 전에 연인이 생겼습니다. 분에 겨울 만큼 행복하게 교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국의 어느 파티에서 만났습니다(나에게는 굳이 발걸음할 일 없던 외국이다만 그에게는 출신지였지요). 몰골이 화려한 그 아이가 처음에는 파티의 초대 가수인 줄로만 알고 말을 걸었던 것이 관계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주고받았던 말과 눈빛은 장담컨대 실없었다만 종종 의중을 발칵 찌르고 부패한 정서를 장난치듯 긁어내렸으니 우리는 쉬이 다음을 약속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행을 약속한 우리는 파티가 끝나고 나서 거의 곧장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연인이 된 것은 그 후의 일입니다. 같은 방과 일정을 공유하면서 두툼한 인생사와 필름지만큼이나 얇은 유동의 고뇌를 나누어 가졌습니다. 나는 그 아이를 마땅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받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던 그의 미성숙을 눈을 감은 채 손끝으로만 더듬으며 마음속 연심을 조각해나갔습니다. 여행 끝바지에 우리는 크롬바커를 그득히 담은 유리잔을 부딪히며 동거를 약속했습니다. 나는 이번 사랑이 잘 될 줄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망령 둘이서 생의 거처를 하나로 묶자 결심한 일에는 의미가 깊은 줄로만 압니다.
나는 그 아이를 위해 꽃집에 들르고 수더분한 데이트 멘트를 하는 일을 즐겼습니다. 돌아오는 감상은 대체로 ‘나쁘지 않네’ 정도의 시답잖은 대꾸였으나 그 아이는 새빨간 꽃 위로 까만 입술을 비죽대며 기꺼이 12홀 하이 워커의 무시무시한 끈을 묶고 나갈 채비를 해주었으니 나는 행복한 존재였던 게지요.
하루는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지지입니다. 귀여운 이름이지요. “에셔는 원래 깃털처럼 가벼워. 널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
나는 웃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연인을 잘 알고 있었으니 참작할 만한 힐난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보다 먼저 그의 연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는 뒤에서 혀를 베 내밀며 일갈했습니다. “신경 쓰지 말지 그래, 지지. 난 피터에게 꼬박꼬박 ‘나쁘지 않다’고 대꾸해주니까 말이야.”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눈빛이 나와 에셔의 교제를 처음 전해 들었을 때의 지지와 비슷해 보여 덧붙입니다. 당신이 이해한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교제했고 이제는 교제하지 않으며 현재 교제 중인 사이들이 맞습니다. 복잡하게 됐습니다.
지지는 그 날 기분이 상해 웩 소리를 내곤 그 길로 곧장 집으로 돌아갔고, 에셔와 저는 좋아하는 바에 들러 캐주얼한 데이트를 즐겼습니다. 원뿔을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잔에 남은 까만 립스틱 자국이 사랑스러워 허락을 구하고 그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돌아온 것이라곤 또 감질나는 ‘나쁘지 않네’ 였다마는 더불어 까만 입맞춤이 다시 한번 돌아왔으니 나는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고 그의 허리를 받쳤습니다.
우린 연인이 되었다네. 그 한마디에 다음 날 지지가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어제 등을 보이던 모습과는 천외할 정도로 반대의 모습이었지요. 온몸으로 이 상황이 우습다 표하던 그녀가 말했습니다.
“아하하, 하하하하! 젠장, 지저분하기 짝이 없게 됐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는 데에 그쳤던 게지요.
2.
그 날은 연인의 272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습니다. 나는 생일 케익을 삼층으로 구웠고 까만 버터크림으로 아이싱을 하며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회전판에 올려둔 케익이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날카롭지 않고 긴 칼에 검은 크림을 묻혀 케익 시트의 측면을 칠했습니다. 회전판에 올려둔 케익이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날카롭지 않고 긴 칼에 검은 크림을 묻혀…….
“피터, 위에는 뭐라고 적을 거야?” 지지가 물었습니다.
나는 웃으며 Happy Birthday Asher 하는 시시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정석의 대답이었지요. 지지는 가볍게 웃으며 거실 소파에 누워 싸구려 안감이 삐져나온 헤드에 단발머리를 비비적댔습니다. 테이블에 놓자 딱 나의 가슴께까지 오늘 케익 위로 나는 하얀 크림으로 정직한 축하의 문구를 적었습니다. 생일 축하해, 에셔. 그 아이가 지루한 문구라고 투정을 부리면 기꺼이 그 위로 얼굴이라도 박아줄 생각으로 말이지요.
“두 명이서 먹기엔 케익이 너무 많은 거 아냐? 무식하게 삼단씩이나 되는 케익이라니.” 지지가 잇새에 롤링 타바코를 물며 중얼거렸습니다.
“옆집에도 나눠주면 되지. 그럼 둘보다 더 많은 사람이 에셔의 생일을 축하하게 되는 셈이니 좋지 않나.” 나는 272개 중에 첫 번째 초를 케익 위로 꽂으며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할 게 없으면 와서 초를 꽂는 것을 도와주게.” “됐어. 이백 몇 개를 어느 세월에 꽂아?”
딸기향 분홍 연기가 가볍게 피어올라 천장에 닿기도 전에 사그라드는 모습을 에셔(그렇습니다 나의 연인인 그 아이)는 그저 바라만 보았습니다. 투박한 턴테이블 옆 레코드판 상자 위에 걸터앉아 있는 그의 툭 튀어나온 흰 무릎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식탁 쪽으로 걸어와선 말하더군요. “피터, 나는 영원히 271살일 거야.”
나는 그가 천 년을 구질구질하게 살아남아도 속절없이 사랑할 예정이었으니 그 말이 못내 가여웠습니다. 그는 웃지 않는 얼굴로 자신의 생일 케익에 얇은 초 몇 개를 꽂으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냥개비 같은 손가락 사이에 낀 초 끝은 버터크림을 꿰뚫지 못한 채 밀밭에 베어낸 가라지처럼 테이블 밑을 굴렀습니다. 곧 지지가 저 멀찍이서 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멍청한 피터. 오판이야. 그 케익이 과연 버티겠어?” 지지가 멀찍이서 빈정댔습니다.
“피터, 화를 내야지. 쟤가 네 판단을 비난하잖아.” 에셔가 나의 어깨에 턱을 기댄 채 귓가에 속살거렸습니다.
자꾸 이름을 불리니 머리가 어지러울 참이었습니다. 둘이 모여도 재깍 맞지 않는 것이 의견이고 성격이거늘 셋이니 오죽했겠습니까. 특히 지지와 에셔는 저렇게 투닥거리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그들은 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도 서로를 상처 입히려 들 텝니다.
나는 좋은 날이니 화를 내고 싶지 않다 대꾸하며 연인의 뺨에 입을 맞추곤 케익에 초를 마저 꽂기로 하였습니다. 마침내 272개의 생일초가 빽빽이 들어박힌 검은 케익이 완성되었습니다. 에셔는 글씨가 거꾸로 읽힐 맞은 편에 비뚜름하게 웃었습니다. 빈정대던 지지가 다발에 가까운 생일초에 불을 붙이자 샹들리에에 닿을 듯이 넘실거리는 불꽃이 재미있긴 하였지요. 우리는 노래했습니다. 템포 멜로디 가삿말 전부 평범한 생일 축하 노래였습니다.
사랑하는 에셔, 생일 축하합니다…….
초가 전부 꺼지니 집안이 헛헛할 정도로 어둠에 휘감겼던 것 같습니다. 멀찍이서 레코드판 하나가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데뷔 앨범 3번째 수록곡이었습니다. 절정을 향하는 즈음 곡은 멈췄습니다. 불을 켜고 턴테이블을 확인해보니 레코드판 위에 까만 케익 한 조각이 크림과 촛농을 질질 흘리며 빙빙 돌고 있었습니다.

4.
그 아이의 생일 파티는 즐겁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비록 지지가 선의로 건넨 와인잔이 에셔의 작은 심술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버리는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만 우리에게는 예사입니다. 글라스 파편 정도야 내가 허리를 숙이고 주우면 그만인 것을. 그 둘은 흉터가 쉽게 지고 또 아무는 것이 더디기 때문입니다. 사사로운 이야기지만요.
요즘의 에셔는 부쩍 잠이 늘었습니다. 밤에는 펄펄 날아다니다가도 아침에는 일어나는 것이 힘들다며 침실에 누워 찢어지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곤 했지요.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먹는 일이 즐겁습니다.
“히죽대지 마. 간지러워.” 자꾸 웃음이 새자 지지가 나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툭 밀쳐냈습니다. 나는 가벼운 사과의 말을 건넨 뒤 다시 그녀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맞췄습니다. 나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일 뿐인데 당신께서 그리 벌레 보듯 보시니 곤란할 따름입니다.
아침 식사를 끝낼 때즈음이면 에셔의 노래가 잦아듭니다. 나는 반주 없는 노래를 대번 알아듣고 그에게 말합니다. “2집의 7번 트랙이야……. 그렇지? 자네가 엔딩 곡으로 부르기 좋아하던.”
“맞아. 기억하는구나.” “기억할 수밖에. 그 노래를 부르며 키스해줬잖아.”
돌아눕는 에셔의 얼굴에 창문살 모양의 그림자가 옅게 스몄습니다. 우리는 지난 날을 회상하며 웃었습니다. 발광하는 공연장에서의 눈부신 추억이 벌써 옛일입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차에 지지가 시끄럽다며 침실 문을 쾅 닫아버렸고, 나는 그 아이의 옆에 걸터앉아 까만 실로 스웨터를 마저 뜨기 시작했습니다. (뜨개질은 나의 오랜 취미입니다.)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완성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가슴에 내 이름을 수놓을 거야? 할머니가 손주에게 떠주는 것처럼?” 에셔가 베개를 끌어안으며 물었습니다.
“촌스럽나? 대신 한 쪽 어깨가 드러나도록 만들어주지.” 내가 대꾸했습니다.
“와, 더럽게 섹시하겠네.” “그렇지? 상상만으로도 황홀하군.”
“으하학! 피터. 너도 신사는 못 된다니까.” 에셔가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그 애의 웃음소리가 나에게는 하루가 기분 좋게 돌아가고 있다 생각하게 하는 지표입니다.
문밖에서 지지가 신발을 꿰신고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최악이야! 내지르는 소리가 선명하여 차마 배웅도 하지 못한 날이었습니다.
나는 해가 낮은 저녁 쯤 거실로 나와, 소파에 지지가 놓고 간 듯한 누런 종이를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하루에 두 번은 맞는 우리 집의 고장 난 시계가 저녁 8시 언저리를 가리킬 때쯤, 현관문에 성마르게 열쇠를 꽂아 넣고 흔들어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야행성인 나의 연인이 사랑스럽게도 문틈에 하얀 눈동자를 대고 끔뻑거리며 물었습니다. “누구?”
결국 찰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지였습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얼마나 된다고, 이젠 외우셔야지요. 에셔는 그녀에게 열쇠가 고장 나면 골치 아프니 제발 살살 좀 꽂아 돌리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만 지지는 들은 척도 않았습니다.
“중요한 종이였나? 가져다줄걸 그랬군.” 나는 그녀가 아침에 두고 간 물건이 긴급하여 다시 발걸음한 줄로 확신하고 있었기에, 밖에서 차게 얼어 온 손에 그 종이를 들려줬습니다.
“펼쳐봤어?” “그럴 리가. 자네의 물건인걸.”
“뭐, 그건 됐어. 갈 곳이 있으니까 따라와.” 지지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숙여 목덜미를 내주며 말했습니다. 나는 민틋한 목덜미에 이빨 끝을 슬슬 문지르며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렸습니다.
“얼마나 멀리 가는지는 몰라도 날이 추운데. 겉옷을 빌려줄까?” “가까워. 일부러 가까운 곳으로 골랐으니까 걱정 마.” 나는 잠시 어지러워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곤 안감이 두터운 겨울 외투를 하나 둘러주었습니다. 기행이 버릇이니 나쁠 것은 없었습니다.
“다녀오겠네.” 나는 연인에게 말했습니다.
“피터, 가지 마.” 새까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그가 대답했습니다.
“왜?” “네가 거기 가면 지루해질 거 같거든.”
“금방 돌아올 텐데.” “그게 문제야.”
“그럼 같이 갈 텐가? 지지. 에셔도 가고 싶어 하는군.” 내가 물었습니다.
“웩, 알아서 해.” 지지가 먼저 현관문을 열어젖히며 말했습니다.
하늘이 텁텁하니 덩달아 달빛도 여릿한 밤이었습니다.
1.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하지?"
툭 튀어나온 화두.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뱀파이어들이 날 바라보았다.
에셔는 눈을 끔벅이다가 의자 등받이에 느른히 기댔다. 검게 칠한 엄지 끝이 피터와 에셔 자신을 콕콕 지목하며 되물어왔다.
"그 '사람'의 범주에 우리도 들어가는 거야?"
반쯤? 하며 한쪽 입술을 죽 찢어 웃으니, 이번엔 짐짓 진중한 표정을 한 피터가 상체를 숙여왔다.
"다시 돌아오지 않길 바란다면 수족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수장하는 게 좋다네."
약아빠진 농담을 어린애 겁주는 투로 말하는 꼴이 마음에 들었다. 손에 잡히는 걸 내던지고 비명을 지르듯 웃으니, 조각 치즈에 뺨을 맞은 피터가 아무렇지 않게 그걸 주워섬겼다.
그 모습을 보며 낄낄 웃던 에셔가 허옇게 바랜 눈동자를 데룩, 굴렸다.
"보통은 사자가 보이지 않도록 묻어 둔 뒤에 추모를 하지. 장례식이라는 잔치도 벌이고."
"뭐야? 웃긴다 그거."
"그렇지?"
나와 에셔는 얼간이들처럼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다 웃음을 뚝 그친 에셔가 '인간인 네가 그걸 우리한테 물으면 어째?'라며 비아냥댔고, 나는 반쪽짜리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니라며 그를 매도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는 바카디의 독한 열기가 기꺼우니, 욕을 뱉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이어지는 질문이 있었다.
"그럼 뱀파이어가 죽으면 어떻게 해?"
마침 에셔가 건배를 위해 잔을 들어 올리던 참이었다. 에셔의 시선은 피터를 향했고, 피터는 나를 보며 뱀처럼 미끈한 눈매를 접어 웃었다.
"지지, 뱀파이어는 죽지 않는다네."
"그럼 에셔는? 하프잖아."
"하프 뱀파이어는……."
누군가의 잔이 섣부르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쨍! 유리잔이 깨어질 듯이 맞부딪혔다. 그를 뒤따른 취기 어린 웃음소리가 다이닝 룸에 울려 퍼졌다. 끝없이 웅웅 울려댈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Two-

그 메아리를 선명히 기억했다.
문득, 맑은 한낮 아래 놓인 잿빛의 고성을 문득 올려다보았다. 성벽 위에서부터 칙칙한 얼룩이 부산스럽게 흘러내렸고, 볕이 미처 닿지 못한 아래쪽은 돌 틈새마다 짙은 이끼가 치덕치덕 끼어 이 건축물이 지나쳐온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외부로 보이는 세 개의 성탑 중 하나는 아스라이 무너져내려 넝쿨이 기어오르고 새가 둥지를 틀었다. 검은 지빠귀가 울어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당의 묘비들을 성큼성큼 지나치고, 드높은 문짝에 손을 올렸다.
똑똑.
문을 두드린 뒤에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에 찾아와 주었건만. 문 안쪽은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신경질적인 발길질로 문을 쾅쾅 찼다. 소리를 듣고 성의 주인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무덤가를 돌아보았다.
음침한 무덤 줄 사이에 엎어진 묘비가 하나 있었다. 삐뚤어지게 박혔을지언정 뿌리는 제대로 내리고 있는 비석들이 태반이건만. 검은색 묘비만 덩그러니 무너져내려, 언뜻 보기엔 무덤에 구멍 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구멍 안에 들어있던 망자가 금방이라도 몸을 일으켜 내 귓가에…….
"지지."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서 있는 창백한 낯짝의 뱀파이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신사다운 피터의 손끝을 따라, 성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엎어진 에셔의 묘비를 뒤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에셔의 생일날이자, 그가 죽은 지 꼬박 32일째 되는 날이었다.
2.
새까만 케이크가 피터의 손길 위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누군가를 추모하기에 적합한 색채였으나, 한껏 높게 쌓아 올린 케이크가 그 용도로 쓰일 것 같진 않았으므로. 뻔히 물었다.
"피터, 위에는 뭐라고 적을 거야?"
"Happy Birthday Asher."
진부해. 아일랜드 탁자 뒤에 서 있는 피터 들으란 듯이 소리 내 웃었다. 오늘의 주인공도 케이크 위에 쓰인 문구를 보면 똑같이 읊조렸을 게 분명하였으나, 허연 크림으로 쓰인 고루한 문구가 검은 손끝에 헤집어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죽은 자는 어느 곳에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 그가 생전에 모욕해대던 이 세상의 순리였으니.
생각의 흐름을 따르다 보니 참을 수 없는 유쾌함이 입술 끝을 비집어 댔다. 비웃음이었다.
탁.
가벼운 소리와 함께 케이크가 탁자 위에 놓였다. 장장 두 시간 동안 오롯이 피터의 손길로만 만들어진 검은 탑. 성서에서 바벨탑을 보는 시선이 이러하였을까. 껄끄럽게 목격하던 시선 그대로 피터와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숙이면 핏물이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은 붉은색 눈동자가 엷게 휘었다.
피터의 자애로운 눈동자는 상대의 시선을 줄곧 따라다녔다. 마주한 누군가는 불쾌하다며 혀를 차기도 했었지만 나는 시선이 닿는 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는 그의 오싹한 배려에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셋이서 함께 저녁을 먹는 날이면 나의 빤한 시선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에셔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옆얼굴에 오히려 위화감을 느끼곤 하였으니.
하지만 이제 에셔는 없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심술처럼 툭 내뱉었다.
"두 명이서 먹기엔 케이크가 너무 많은 거 아냐? 무식하게 삼단씩이나 되는 케익이라니."
어쩐지 연기가 주는 위안이 필요해져, 품에서 틴케이스를 꺼내 연초를 깨물었다. 이 낡아빠진 소파가 주는 편안함을 버리고 테이블에 앉을 기분이 아니었다.
"옆집에도 나눠주면 되지. 그럼 둘보다 더 많은 사람이 에셔의 생일을 축하하게 되는 셈이니 좋지 않나."
게으른 작태로 누워 성의 없이 성냥갑 옆구리만 틱, 틱 긁어대다가 결국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피터가 허리를 굽혀 분홍색 초를 꽂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실없는 웃음이 샜다. 불붙은 성냥 하나를 괜히 바닥에 내버렸고, 카펫에 불이 옮겨붙기 전에 워커 신은 발로 지져 껐다.
발을 들어 올려 검게 그을린 모직을 발견하고, 신발 밑창이 멀쩡한지 확인하던 차였다.
“할 게 없으면 와서 초를 꽂는 것을 도와주게.”
무어라 대꾸하려고 입을 열다가 그대로 짧게 탄식했다. 아. 물고 있던 연초가 더러운 카펫 위로 툭 떨어졌다. 뇌리를 훑어 감정을 지배하는 이 무력감. 저 노망 난 뱀파이어가 너저분하게 질러대는, 의미 없는 언행들.
짜증 난다. 느슨한 미소가 낯짝에 걸렸다. 굼뜬 동작으로 연초를 주워들며 대꾸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소리를 지르지 않고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축하 케이크와 먼 곳으로 걸었다.
“됐어. 이백몇 개를 어느 세월에 꽂아?”
3.
생일 축하 합니다. ……하는 에셔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좀 전에 불렀던 단순한 멜로디가 계속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다.
기분으로는 진열장 안에 늘어진 와인병만이 유일한 벗처럼 느껴졌다. 친구란 자고로,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었으니까. 내키는 대로 술병 하나를 꺼낸 뒤에 피터를 불렀다. 36년 묵은 술을 마셔도 되겠냐고 허락을 구하기 위한 건 아니었고, 지루함을 어떻게든 지워보려는 수단으로 그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피터. 늘 하던 거나 하자."
술병의 길쭉한 멱살을 틀어쥐고 빙그르르 돌아섰다. 이 고성 주변에 옆집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긴 하냐는 의문이 채 해결되지 않았으나, 그는 정말 이웃들에게 나눠주기라도 할 셈인지 남은 케이크를 조각내고 있었다. 피터가 고개를 들었다.
날카롭지 않고 긴 칼에 묻어 있던 검은색 크림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덩어리째 뚝뚝 떨어졌다.
"늘 하던 거라니, 아침 식사 말인가?"
"그거 말고."
크림이며 빵 조각이 널브러진 식탁 위에 걸터앉으니 눈높이가 딱 맞았다. 슬 웃으며 피터에게 꽉 틀어막힌 술병 입구를 내밀었다.
"외로움에 관해 이야기해 봐, 피터."
피터의 시선이 잠시 와인 병목에 닿았다가 떨어지더니, 뽁. 창백한 손길에 코르크 마개가 쉬이 뽑혀 나갔다. 흐흐, 절로 질 낮은 웃음소리가 샜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로 둥그런 유리 주둥이에 입을 맞춰 고개를 꺾어 올렸다.
한순간 욕망이 닿아 있는 곳이라곤 포도주가 주는 취기뿐이었으니. 그걸 넥타르처럼 마셨다.
"그새 지루해졌나 보아. 내 친우의 흥미는 일 분도 채 넘기지 못하여 대화 주제가 마를 새 없군그래."
"이 고성에 들어섰을 때부터 재미는 이미 물 건너갔어."
입술 밖으로 넘친 와인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있노라면, 피터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옅게 미소지었다.
"나 또한 예전처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으나, 지지."
문장이 한 번 끊겼다. 눈을 홉뜨던 나는 그 틈새에서 불쾌한 향기를 맡았다. 마치, 추깃물을 먹고 기름기가 도는 젖은 흙냄새가 나. 눈살을 찌푸리는 새에 피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내겐 털어놓을 외로움이 없다네."
"왜?"
의문은 자연스러웠고, 반문은 반사적이었으나.
"내 곁엔 에셔가 있잖나. 더는 외롭지 않아."
피터의 답변에 덕지덕지 들러붙은 광증이야 쉽사리 예견할 수 있었다. 쭉 지켜봐 왔으니까.
예상 뒤에는 되레 기대했다. 그의 광기를 대면하고 정당히 비웃을 수 있기를. 그러니. 아, 하하! 짧게 끊어진 탄성 뒤에 가파른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에셔? 에-셔어?"
양껏 웃었다. 손뼉을 치고, 삿대질하며. 전할 수 있는 모든 비난을 담아 그의 턱밑까지 바짝 들이밀었다. 그러면 피터는 그 모욕 앞에 의연히 서서.
"무슨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있나?"
-라고 되물을 뿐이었다. 오, 불쌍한 피터. 이제 겨우 스무 해를 넘겨 산 인간의 손으로 이 천년 가까이 살아남은 뱀파이어의 뺨을 다감히 쓸어 만졌다. 네가 미쳤다 해도 상관없어. 나는 네 입으로 피력하는 비참함이 좋아. 그러니 어서.
"그냥 외롭다고 말해. 피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피터는 곧 고개를 돌렸다. 마치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온 것처럼. 허공을 보고 피터가 미소지었다. 못 말리겠다는 둥,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광인이 망자와 대화를 했다. 나는 알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단어들이 물처럼 흘러내렸다.
허공을 가로지르던 피터의 언어가 느리게 멎어 들고 있기에. 찌푸린 표정으로 목구멍 아래에 술을 쏟아 넣다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피터의 고개가 기울었다. 길게 드러난 목덜미에 두드러진 근육이 한줄기 선을 그었다. 가늘게 뜨인 속눈썹. 그 아래에 비치는 붉은 시선이 공허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내 그는 눈을 감고 살가운 색의 입술을 벌렸다. 발간 혀가 공기를 마중했다. 손으로는 망령의 눈가를 쓰다듬고, 뺨과 목덜미를 다정히 쓸어내리면서. 그 뱀파이어는 상실과 입맞춤하고 있었다.
술맛이 뚝 떨어졌다. 굳은 입매를 비틀며 휙 돌아섰다. 선반에서 와인잔 3개를 꺼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스템 부분을 끼운 채로 와인을 따랐다. 세 번째 잔을 따를 때쯤엔 엄지에 걸친 잔에서 와인이 비스듬히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입맞춤을 끝낸 그에게 와인잔을 내밀었다.
"자."
"오, 에셔. 지지가 우릴 위해 술을 다 내어주는군."
에셔가 살아있었다면 어떤 말로 대꾸했을지 뻔히 보였다. 어차피 네 술인데 말이야.
"하하! 그래도 내가 내어준 것이니."
억지로 입매를 죽 당겨 웃었다. 아무렴. 피터의 손에 잔 하나를 들려주며 읊었다. 이건 피터 거. 이건 내 것. 그리고 이건… …에셔 거. 허공에 놓인 잔이 추락했다. 모자이크 바닥에 와인과 유리 파편이 비산 혈흔처럼 산재했다.
순간의 적막이 공간을 짓눌렀다. 잠깐 내게 고정되었던 피터의 시선이 또다시 허공을 향했다.
"…… 다친 덴 없나?"
비명이 차올랐다.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와인잔이 테이블 위에서 난잡하게 굴렀다. 두 번째 혈흔이 남았다. 뻗어 나간 손이 피터의 목에 매여있던 고상한 크라바트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그런데도 평온하신 당신의 낯짝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온도가 높은 비명을 그의 면전에서 쏟아냈다.
"지금 내가 일부러 잔을 떨궜다고 생각하는 거야, 피터? 에셔는 잔을 받을 수 없어. 알아?"
왜냐하면.
"에셔는 죽었으니까! 에셔는 죽었다고. 에셔는 죽었어, 피터!"
밀쳐내듯 멱을 놓았다. 그의 몸이 의자에 나동그라져 앉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의연한 낯짝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도 모두 지겨웠다. 불멸의 생이 아무렇지 않게 토로하는 '외로움'에 필멸의 생을 빗대어 보며 즐거워하던 때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더는 해야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피터가 내 뒤통수에 대고 말을 덧붙였다.
"지지. 이번엔 얼마나 머물다 갈지 모르겠지만, 2층 손님 방을 청소해두었다네."
"필요 없어, 멍청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엿을 날렸다. 높은 통굽을 쾅쾅 굴러대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와중에, 아래층에서 피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아이가 자네에게 심술부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그대로 계단 난간을 뻑! 걷어찼다. 유려하게 휘어 있던 곡선 하나가 뚝 끊어져 아래로 우당탕탕 떨어졌다. 짜증 나! 한 번 더 외치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모든 것에서 역정이 치밀었다.

4.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과 닮은 그림자를 끌고 다닌다는 생각이. 나는 타인이 가진 그림자를 빤히 들여다보는 걸 즐겼다. 그러면 그림자도 내게 고개를 숙여, 제 목에 걸린 이름표를 보여주었다. 거기에 적힌 것은 상대의 약점이나 다름없어서. 나는 타인을 대할 때 그 이름을 입에 올리며 비웃거나 비난하는 것으로 재미를 보곤 했다.
가진 그림자가 없으니 난장 피우고 다니는 일이 퍽 즐거웠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나는, 내게도 그림자가 존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자꾸만 어깨를 넘어올 듯, 등 뒤에서 시커먼 존재가 넘실거리고 있는 탓이었다.
“그럼 같이 갈 텐가? 지지. 에셔도 가고 싶어 하는군.”
“웩, 알아서 해.”
투덜대며 문을 나서면 하늘이 보였다. 여릿한 밤. 달이 얕은 구름 뒤에서 은연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피터가 건네준 외투를 어깨에 걸치며, 연초를 하나 꺼내 물었다. 시월의 마지막 날. 서늘한 밤바람에 허연 숨이 딸려 나왔다.
뒤에서 현관을 나서는 피터의 발소리가 들렸다.
"지지."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피터가 불을 내밀고 있었다. 성냥이 줄곧 타들어 가는 와중에, 나의 시선은 품에 성냥갑을 넣고 있는 그의 허연 손등에 닿아있었다. ……그는 담배를 잘 피우지 않았다. 나와 함께 줄담배를 피워대던 건 에셔였지.
성냥이 바싹 타들어 피터의 손끝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열기가 고통을 수반할 것이 뻔할진대, 그는 미동도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고개를 숙여 연초 끝을 주홍색 불에 담금질했다. 곧, 피터가 말을 이었다.
"아예 가버린 줄 알았건만, 외출이었군."
"응."
길게 대꾸하지 않았다. 단백질 타는 냄새를 풍기던 손끝이 불씨를 바닥에 내버렸고, 나는 그 티끌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세웠다. 피터가 옆에 와서 섰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한, 그는 더 깊게 질문하지 않을 터였다. 선을 지킬 줄 아는 괴물이었으니.
"가까운 곳으로 골랐다더니. 내 집 앞마당이었나."
문장에서 느껴지는 조심스러움에 웃음이 샜다.
"내가 아직 화났다고 생각하는구나."
"짜증 난다고 하는 정도면 몰라도, 자네가 최악이라고 말하면 제법 화났다는 뜻이니."
"이런… 분석하지 마. 내 의사가 들으면 받아적을지도 모르니까."
실없는 농담이 교차했다. 결국, 나는 소리 내 웃었고 피터는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여느 때처럼 평범한 표정이 스치며 눈이 마주치면, 잠깐의 정적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추모식에 갔었어."
유려한 표정이 의문을 품고 기울었다.
"누구의?"
"시끄러운 음악을 하는 어떤 아티스트."
미리 말하지만, 추모식은 끔찍했어. 지저분했고. 말을 덧붙인 뒤엔 소매 안쪽으로 구겨 넣었던 종이를 그에게 내밀기로 했다. 파스락. 바스락. 피터가 종이를 정성스레 펴서 머리글자를 확인하는 동안, 나는 무덤가로 걸어 나갔다.
내가 에셔의 묘비를 향해 걸을 때, 피터는 망령과 대화를 나눴다. 이것 보게, 에셔. 자네의 과격한 팬들이 자네의 추모식을 연다는군. 연초를 빨아들였다. 꼬리처럼 늘어진 잿빛 연기가 허공에 허연 선을 그었다. 삐뚜름한 입술 밖으로 탁한 날숨이 흩어졌다.
돌연 몸을 돌려세웠다. 어깨에 걸려있다 날아간 외투가 누군가의 묘비에 냉큼 걸렸다. 양팔을 열어 보이며 선언했다.
"맞아, 난 에셔의 악성 팬이지!"
그가 비좁아 터진 구식 무대 위에서 1집 첫 번째 트랙을 부르짖을 때, 검은색을 칠하지 않아 허연 속눈썹을 손끝으로 간질이며 사랑한다 속삭였고. 보다 더 넓어진 공간에서 2집 7번 트랙을 노래할 때는 신발 끈 모양새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의 곁을 떴다. 끝끝내 내가 너의 악몽이 되어주겠다며 저주하는 게 지금의 내 일이었으니. 나와 에셔는 서로 혐오하는 것이 맞았다. 그러니 에셔가 죽어도 나는 깔깔 웃으며 속 시원하네! 외치고 끝냈어야 했다.
손가락 사이에 걸쳐있던 장초가 검은색 묘비 위로 떨어졌다. 등 뒤에서 넘실거리던 그림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왜 너는 웃을 수가 없지?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았다. 어찌하여 피터는 좌절하거나 외로워하지 않고, 너만 여기 혼자 남아 에셔의 무덤에 침을 뱉고 있느냐고.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등으로 입가를 덮었다. 손등과 맞닿은 윗입술이 그대로 죽 밀려나며 허연 이를 드러냈다. 잇새로 저주가 줄줄 새어 나갔다.
"악성 팬이라서 더 잘 아는 것도 있어. 에셔는 미련이야."
"오, 지지……."
"에셔가 네게 준 것도 미련일 텐데. 너는 왜 미련을 먹고 사랑을 뱉니, 피터."
눈썹이 멋대로 일그러졌다. 지빠귀도 울지 않는 어둑한 사위에 우뚝 선 피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위화감이 들었으나 타인을 향해 뻗어 나가는 칼날이 쉽게 멈추지는 않았다.
피터의 일렁이는 눈동자를 직시하며, 바닥에 누워있을 에셔의 묘비를 가리켰다.
"에셔는 죽었어, 피터."
그의 묘비에는 이름도 비문도 없을 터였다. 추도사 대신 써 내린 'Why I miss u so Far?'. 피터가 손끝을 헤집어가며 써내린 혈서를 여실히 기억했다.
"우리가 함께 묻었잖아."
피터의 한쪽 손이 허공으로 들렸다. 기척 없는 동작에 놀라 움찔하는 새에 그 뱀파이어는 자신의 창백한 낯을 쓸어 만졌다. 그제야 심장을 두방망이질하던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그의 웃지 않는 낯을 줄곧 목격하고 있는 탓이었다.
피터는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표정을 지우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지지. 뱀파이어는 죽지 않는다네."
뿌리 깊은 신앙.
"하지만 에셔는……!"
슬픔의 광증.
"그러니 에셔는 죽지 않아."
상실에서 자라난 맹신. 나는 피터가 가진 그림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외로움' 세 글자였으나. ……순간 오한이 끼쳐 올랐다. 등 뒤의 공허에 망자의 이름을 붙이면, 주인 된 생자는 어떻게 되는가.
"자네도 보고 있지 않나."
"웃기지 마! 그 자식이 무덤에서 일어나 살아 움직인다면 내 손으로 죽여버리고 말걸."
그제야 피터가 온화하게 웃었다.
무어라 더 쏘아붙이려는 순간, 오래된 탄식이 무덤의 검은 구멍 속에서 토해져 나왔다.
"-거짓말."
누가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시선은 내내 두 쌍의 붉은 눈동자에 옭매여 있었으나, 피터의 입술은 그저 웃을 뿐 움직이질 않았고. 다급히 입술을 더듬어 보면, 내 입술은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것처럼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서늘함이 치닫는다. 망자가 연주하는 곡이 귓가에서 위험하게 울려댔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금도 썩지 않았을 허연 눈동자가 어두운 무덤 안에서 휘꺼덕 몸을 까뒤집는 모습이. 등 뒤에 있던 그림자가 몸을 숙이는 기척마저도. 그림자가, 어디가 앞인지 모를 눈알 두 짝을 주워들고 자신의 얼굴에 박아넣었다.
바짝 솟은 온몸의 솜털이 의지를 가진 듯 줄창지게 한기의 기척을 쫓아다녔다. 망령이 거기 있었다. 망자가 몸을 일으킬 것이다. 발꿈치로 흙을 짓이기고, 가장 먼저 땅과 닿은 엄지발가락으로 균형을 잡으며. 남은 아홉 개의 발가락으로는 몸뚱이를 지탱한 채로. 가느다란 다리뼈 위로 말라붙은 살가죽이.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어긋나는 소리를 내며 몸을 풀었다. 허연 머리털은 자라나기가 무섭게 검게 물들어 밤하늘과 동화되었다. 굳어있던 허리 관절이 끼긱대며 비명을 질러댔다. 망령이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서리 같은 한숨이 귓가에 닿고 있었으나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소생이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에셔가 거기 있었다. 에셔가 나를 보고 있었다. 에셔가. 에셔가 금방이라도 내 귓가에…….

……아! 나는 끝내, 망령을 향한 피터의 신앙이 얼마나 한순간이었는지. 눈에 보이는 실체를 맹신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이었는지를. 완전히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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