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작 고딕호러
- 2021년 10월 30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10월 31일

남겨진 자들에게 앞으로의 삶에 대해 전한다.
최초의 살인 죄가 너희 후계의 가슴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나의 죽음이 그림자처럼 쫓아다닐 것이다.
내게서 흐른 피가 땅을 적시고 그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으리니
아나스타시아 家는 더는 어떠한 권력도 부도 얻지 못할 것이다.
당신들 모두가 천사의 이름을 갖고 태어났으나
살아있는 한 삶은 지옥일 것이다.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니라 남겨진 자의 몫이다.
나의 죽음이 당신들과,
특히 라파엘 아나스타시아에게 끔찍한 저주가 되기를
진심으로, 진심으로 소망한다.
마지막으로.
이 유언장을 처음 발견한 이가 당신이길 바란다.
라파엘 아나스타시아.
"이건 당신이 쓴 건가요, 여보?"
캐서린 우드 아나스타시아가 책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미카엘은 고개를 들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책 표지는 송아지 가죽처럼 보였고, 가장자리로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했다. 페이지는 수백 장으로 두꺼웠는데, 낱장은 아주 얇았다. 크기는 캐서린의 작은 손에도 쏙 잡히는 정도였다. 책배는 금박을 입힌 듯 반짝거렸고 붉은색 가름끈이 걸려있었다.
"그건 어디서 났습니까?"
"시집을 꺼내려는데 손가락에 걸렸어요. 툭 떨어졌답니다."
"떨어졌다고요?"
"네, 위 칸에서요."
"이리 주겠어요?"
보드라운 카펫을 밟으며 캐서린이 다가왔다. 자신의 남편, 미카엘 아나스타시아가 여러 번을 연이어 되묻는 경우가 많지 않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깊게 관여하지 않는 부부였고, 상대에게 부딪힐 것 같으면 한 걸음을 물러나 상대를 관조하는 버릇이 들어있었다.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그 책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캐서린은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미카엘의 섬세한 방어기제를 존중하며 캐서린은 그 작은 책을 미카엘에게 건네어 준다.
그때 서재의 불이 꺼졌다. 캐서린은 등불이 있던 쪽을 바라보았으나 서재에 창문은 열려있지 않았다. 어쩌면 기름이 다 떨어진 모양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인들이 하나둘씩 저택을 떠나 도망친 뒤로 이 저택 곳곳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서재는 사람들이 자주 들르는 공간도 아니었고, 실제로 책장과 의자 위엔 뽀얀 먼지가 옅게 덮여 있기도 했다. 카펫이 깔려있는데도 바닥엔 묘한 냉기가 들었다.
"이런." 어둠 너머에서 미카엘이 탄식했다.
"나갈까요?" 캐서린이 물었다.
"조금 기다려보죠. 누님이 심술을 부리시나 봅니다."
미카엘은 농담을 자주 하지 않았으나 때로 죽은 누이를 소재로 농을 했다. 캐서린은 라파엘에 대한 미카엘의 농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어지곤 했지만, 지금은 기다려 보자는 말에 동의했다. 이곳의 불이 꺼진 것이 창문을 통해 밖에서도 보일 테니, 누군가 곧 기름을 가져올 테다. 또한 섣불리 움직이기엔 불 꺼진 서재 안이 너무 어두웠다.
"라파엘이었던가요."
"기억하는군요."
"결혼식 때 뵈었는걸요. 어떻게 잊어버리겠어요?"
"누님은 그때도 짓궂으셨습니다."
여느 귀족들처럼 마차를 타고 마부의 시중을 받는 대신, 굳이 새카만 말을 타고 찾아들었던 그 모습을 잊어버리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결혼 축하 선물이라며 내려놓았던 그 털짐승은 또 어떤가. 늑대였던가, 순록이었나? 캐서린은 동물의 사체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곤혹스러웠으므로 동물의 종류까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핏물도 다 빼지 않았던지, 짐승을 내려놓았던 자리의 흙은 식이 다 끝나고 나서도 붉게 젖어 있었던 것 또한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남동생을 아끼던 누이가 제 나름으로 엉터리 정략결혼에 항의하는 방식이었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들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사정에 따라 황급히 흘러갔고, 그것이 사랑이나 약속에 의한 것이라기보단 휘갈긴 몇 장의 계약서와 장표 위에 찍힌 도장이나 다름없다는 걸 모두가 알았고, 그러나 아무도 항의하지 않았던 때였다. 미카엘과 캐서린조차 순종적으로 받아들인 일을 그 누이는 화가 나 행패를 부려댔던 걸,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수년이 지나서는 결혼식 날의 악몽까지 추억이 되었고, 아나스타시아의 가세가 기울은 오늘엔 그때 당신 누님을 핑계로 결혼식장에서 도망쳤어야 했다는 농담까지도 캐서린은 가볍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다만 캐서린도 농담을 자주 하지 않는 편이다. 고인에 대한 농담은 좀 더 조심스럽기도 했으니 그녀는 담백하게 사실만 말했다.
"장례식에도 갔고요."
"아." 미카엘이 감탄하듯 내뱉었다. "눈이 내렸던 날 말입니까?"
"네. 당신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요."
"물론 나는 계속 있었습니다."
한겨울의 땅이 단단히 얼어서 인부들이 고생을 했었다. 밤이 새도록 곡괭이질 소리가 그치지 않은 끝에 아나스타시아 家의 공동묘지 한구석에 그들은 비석을 세우고 관을 내렸다. 결혼식에서 보았던 많은 친인척이 얼굴을 내비쳤고 그중에는 물론 남매의 아버지도 있었다. 캐서린은 그때 보았던 성주의 얼굴이 잔가지가 다 날아간 고목 같더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들은 함께 침묵하며 관뚜껑 위로 흙이 덮이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철퍽, 철퍽.
메마르게 얼어붙었던 흙이 왜 관 위로 떨어지면서는 그렇게 젖은 소리를 내는지 그때까진 아무도 깨닫지 못했다. 인부들은 일을 일찍 마치고 지친 몸을 누일 생각에 막무가내로 흙을 퍼 넣었는데도 이상하게 그 넓은 관뚜껑 위에 새겨놓은 Anastasia, 성씨만이 가장 나중에 덮였다. 캐서린은 남편과 결혼한 뒤로 자신의 것이 되기도 한 그 무거운 성씨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눈발이 떨어지기 시작한 걸 뒤늦게 알았다. 얼음 조각에 가까운 작고 차가운 눈송이였다. 그것은 캐서린의 검은 모자로 달라붙고, 주변의 모두의 피부를 할퀴며 냉기를 쏘았다. 눈발은 이젠 무덤이 될 자리, 아직 다지지 못한 흙더미 위로도 내렸다.
남매의 아버지, 성주가 입을 열었었다. '내기가 끝났음을 선언하오.' 청중이 고요한 가운데 선언이 이어졌다. '미카엘 아나스타시아와 라파엘 아나스타시아, 두 아이 중 살아남는 한 명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겠노라 약조했던 것을 다들 알고 계실 것이오. 이제 살아남은 것은 한 명이며, 다른 하나는 심박과 호흡을 잃고 땅 아래로 묻혔으니 결말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소이다. 목숨이 끊긴 것은 내가 직접 확인했소. 그렇기에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밝히리다. 아나스타시아 家의 다음 성주는,'
그때 누군가 탄식했다. 곧이어 흐느낌과 공포, 이를 짓씹는 듯한 신음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캐서린도 아, 하고 작게 놀랐던 기억이 났다.
관 위가 붉었다. 쌓인 흙더미 위로 쌓이는 눈발이 붉게 젖고 있었다. 검은 흙을 도화지 삼아서는 분간하기 어려웠던 핏물은 흰 눈송이를 물들이며 땅 아래를 적셨다. 갓 파낸 겨울의 마른 흙이 왜 그렇게 질척이며 젖은 소리를 내었던지, 그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관에서 배어난 피로 흠뻑 젖은 그것은 이젠 흙이 아니라 살점이나 다름없었고, 굳은 선지 같은 점도로 끈적였다.
인부들이 먼저 연장을 떨어트렸다. 아나스타시아의 성씨를 단 사람들은 피에 익숙했으므로 조금을 더 버텼지만, 그것은 상처나 시체와도 달랐다. 악의였고 저주였으며, 망자가 내보인 것. 산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살인으로 해결하는 것이 그 가문의 전통이었음에도 죽은 자를 재차 죽일 방법은 아무도 몰랐다.
캐서린은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흰 입김이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그 수증기의 베일 너머에

미카엘이 있었다. 젖은 흙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 그가 관을 내려다보았다. 눈발이 거세어졌고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보았던 모습과 같았다. 동그란 안경이 그의 콧잔등에 걸렸고 가늘게 늘어진 안경줄은 머리칼처럼 섬세했다.
차가운 증오가 눈구름을 찢고 상처를 벌린 듯, 어느새 함박눈 사이로 붉은 얼룩이 뒤엉켰다. 잘게 찢은 꽃잎 부스러기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덩어리지고 정수리를 짓눌렀다. 사람들이 겁먹어 고함치는 소리가 두꺼운 천에 덮이듯 한순간에 작아지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캐서린은 숨을 들이쉬며 한 걸음을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등 뒤에 가깝게 서 있던 누군가와 몸이 부딪혔다. 그 누군가는 체구가 크고 손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캐서린은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으나 그가 자신을 부축하듯 붙잡았다는 것만은 기억했다.
무덤 너머의 미카엘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고, 캐서린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한순간 숨을 들이쉬기가 어려웠고, 다음 순간엔 아주 미끄러운 덩어리를 들이쉰 듯 폐 속이 뜨거워졌다.
안경알 너머, 흰 속눈썹에 가린 시선을 읽을 수 없었던 그때부터
미카엘 아나스타시아는 계속 있었다.
서재는 여전히 어두웠다. 완전한 그믐밤이었고, 새벽에 비가 올 모양인지 구름까지 두껍게 하늘을 덮었다. 시야가 암흑에 잠긴지 꽤 되었는데도 캐서린은 여전히 자신의 손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계속 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문득 피로해졌고, 그녀는 앉고 싶어졌다. 불이 꺼지기 전 보았던 서재의 구조를 떠올리며 그녀는 안락의자가 있던 방향으로 조금 전진했다.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었으므로 자연스레 손을 앞쪽으로 뻗고 더듬으며 움직여야 했다. 딱딱한 책장이 닿았다가, 어느 테이블에 씌워 둔 천이 보드랍게 닿기도 했고, 한순간 아주 차가운 공기가 손끝을 스쳤다. 다시 사라졌다. 미카엘이 손 뻗으면 닿을 만치 가까운 곳에서 일러주었다.
"왼쪽으로 반걸음만 걸어봐요."
"이렇게요?"
"그래요.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요."
안락의자의 반질거리는 손잡이가 잡혔다. 캐서린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꼭 아주 오랜 시간을 서 있었던 것처럼 다리가 뻐근한 탓에 쿠션은 거의 침대처럼 느껴졌다. 제 체중이 의자를 푹 가라앉히는 걸 느끼며 캐서린은 안락함에 빠져들었다. 깜빡거리는 잠이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은 자정을 한참 넘은 때였으니 몸의 피로가 그리 이상하지도 않았다. 침묵을 지키다 정말 깜빡 잠들어버릴 것 같아서 캐서린이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미카엘."
"네, 캐서린."
"의자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나요?"
"그런 게 궁금합니까?"
"비밀인가요?"
"누님이 알려주셨습니다."
"라파엘 얘기를 하고 싶은가 봐요."
"그렇진 않습니다."
"정말요?"
"...글쎄요."
미카엘의 목소리가 훌쩍 멀어졌다. 캐서린은 캐묻지 않고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서재 곳곳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탓인지 목이 따끔거리기도 했다. 암흑에 잠긴 서재를 누군가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며 그녀는 의자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내 깜빡 잠들어버릴 뻔했던 쯤 미카엘이 말을 이었다.
"그 의자에 제가 앉아 있었습니다."
캐서린은 미카엘이 암흑 속에서도 의자를 찾을 수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뻔했다. 앉아있던 자리를 양보했다면 그럴 만 하니까. 하지만 미카엘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어릴 때 이야기입니다. 일곱 살 즈음이었죠."
캐서린은 의자에 앉아있는 작고 하얀 아이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 상상이 어찌나 생생한지, 그녀는 어린 남편을 제 허벅지 위에 얌전히 앉혀놓은 듯, 가벼운 무게감까지 느낄 수 있었다.
"누님은 그때 여덟 살 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성을 비운 날, 그러고도 하인들에게 들키지 않을만한 아주 늦은 새벽을 골랐어요. 그리고 제 방으로 몰래 숨어들었죠."
"듣고 있어요."
"누님은 제 침대맡까지 까치발을 들고 걸어왔습니다. 나는 자는 척을 했어요. 하지만 누님은 제 이름까지 부르더군요. 깨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카엘이 어릴 때의 이야기를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내가 악몽을 꾸고 있을까 봐 왔다고 하더군요."
"악몽을 꿨나요?"
"글쎄요. 일곱 살 때 꾼 꿈을 기억할 수는 없는 법이라."
"라파엘이 한 말은 기억하네요."
"누님이 잠시 나가자고도 했습니다."
"새벽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그리고 우린 서재로 갔습니다."
"이곳이군요."
"그래요. 2층의 구석진 방."
캐서린은 경청했다. 문득 미카엘의 목소리가 꽤 낮은 곳에서 들린다는 걸 깨달은 것이 그때쯤이었다. 아마 그도 다리가 아파져서 쪼그려 앉은 게 아닐까? 서 있는 성인의 기준으로 허벅지에 겨우 닿을 즈음의 높이에서 미카엘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누나가 손을 잡아준다고 했어요."
"잡았나요?"
"놓으면 안 돼. 배신자는 죽음뿐이랬어."
미카엘이 속삭였다. 캐서린은 그가 어릴 때 누이에게 건넸던 말을 그대로 옮겨 들려주었음을 깨달았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드디어 누군가 등불을 가져온 것이라고, 캐서린은 생각한다. 안쪽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벌컥 문이 열렸고, 동시에 꺼졌던 실내가 환하게 타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라파엘 아나스타시아다. 검은 곱슬머리가 흘러내려 이마를 덮었고, 새벽의 피로로 눈가는 어두웠다. 몇 남지도 않은 하인을 굳이 부를 것 없이, 이 저주받은 고성의 성주가 된 그가 직접 서재로 왔다. 한참을 홀로 돌아다닌 듯, 라파엘의 큰 체구에서 열기가 일렁였고 단단한 손에 들린 등불은 기름이 반쯤 줄어 있었다.
라파엘의 등장과 함께 캄캄했던 어둠은 순식간에 걷힌다. 짙은 불빛으로 라파엘의 얼굴에 단단한 윤곽이 도드라진다. 두껍게 찌푸린 눈썹은 화난 것처럼 보였다.
"캐서린."
라파엘이 부른다.
"밤이 늦었군. 돌아가는 게 좋겠어."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캐서린이 눈을 깜빡였다. 라파엘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곧바로 다가갔다. 캐서린의 무릎 위에는 작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검은 표지의 성경이었고, 붉은 가름 줄이 끼워져 있었다. 라파엘은 캐서린이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뻗어 그 책을 들어 올렸다. 성경의 표지와 본문 사이, 끼워져 있던 종이 한 장이 흘러내렸다. 팔랑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것을 라파엘은 곧바로 낚아챘다. 이어 깊은 고민 없이 펼쳐보았다. 글씨를 읽는 순간 아릿한 고통이 라파엘의 심장을 찔렀다.
Last Will of Michael Anastasia. 그것은 미카엘의 공개되지 않은 유언장이었다. 내용은 저주로 점철되어 있었다. 누이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거론하며 마무리하는 그 지독한 종이를 라파엘은 한 번 더 읽었고, 재차 읽고서야 입을 뗄 수 있었다.
"캐서린. 이거 읽었나?"
캐서린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라파엘 외의 아무도 없었다. 미카엘 아나스타시아가 사망한 뒤, 혼자 남은 동생의 아내를 라파엘은 성심껏 돌보아왔다. 미카엘의 관을 내리던 날에 자신을 부축하여 성으로 돌아온 이도 라파엘이었다는 걸, 이제 캐서린도 기억할 수 있다. 먼저 손을 놓은 것은 누구였나요? 캐서린은 묻고 싶었으나 남편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하릴없이 대답한다.
"아니요. 불이 모두 꺼져서 너무 어두웠어요. 글씨는커녕 내 손가락 끝도 볼 수 없었는걸요."
"그럼 이걸 처음 읽은 사람은 나로군."
"그게 뭔가요?"
"이 성이 저주받은 이유지. 하인들이 도망치는 이유기도 하고, 늙은이들이 픽픽 나자빠지는 이유기도 하고…"
"읽어봐도 되나요?"
"글쎄, 잘 모르겠군."
라파엘은 유언장을 빼내고 남은 책을 캐서린에게 돌려주었다. 캐서린은 자연스레 그 붉은 가름끈이 끼워진 페이지를 펼쳤고, 눈에 들어오는 첫 문장을 읽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눈으로만 문장을 읽어내리며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미카엘이 있어요. 조금 전까지 서재에 나와 같이 있었죠. 죽은 게 라파엘, 당신이었다고 깜빡 믿을 만큼 생생했어요."
"...지금은 어때."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그는 계속 있었다고 했어요."
라파엘은 한동안 캐서린을 바라본다. 어떤 이들은 동생의 아내가 장례식 이후로 미쳐버렸다고 말하기도 했으나, 그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의 헛소리라는 걸 라파엘은 안다. 캐서린은 영리하고 섬세한 사람이었으며, 완전히 제정신이었다. 라파엘은 그러니 그녀를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부러워하는 편이었다. 라파엘이 곧 말을 이었다.
"캐서린. 등불을 줄 테니 먼저 돌아가겠나?"
"그래도 되겠어요?"
라파엘은 캐서린에게 등불을 건넸다.
"그래. 미카엘이 보고 싶군."
캐서린은 등불을 받고 반대편 손으로는 성경을 들었다. 죽은 동생이 보고 싶다는 말에 그녀는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라파엘은 이미 서재 한가운데 안락의자에 앉아 등을 돌리고 있었다. 곧 서재의 모든 불이 꺼졌다. 라파엘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눈을 감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 중 하나가 죽어야만 했던 그 강제적인 내기에서, 먼저 형제를 배신한 자가 누구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버지를 더 기쁘게 하는 자였던가, 바칠 재물이 더 풍족한 자였던가? 그러나 살아남은 것은 라파엘 아나스타시아였으니, 최후에 배신한 자가 라파엘이 되었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미카엘은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미카엘 아나스타시아의 장례식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아버지는 성의 계단에서 실족사했다. 심약한 친척들이 때때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대부분 장례식에 참석해 그 붉게 젖은 땅을 한 걸음이라도 밟았던 이들이었다. 라파엘도 관에서 흐른 피가 땅을 적시던 광경을 보았었으나, 그는 그때 동생의 결혼식 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짐승의 사체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땅을 적시던 때, 이 지긋지긋한 핏줄을 따라 대를 이으며 아무 죄의식 없이 제 자식조차 갈취하는 가문에 저주를 내리고 싶은 것은 라파엘 아나스타시아 역시 같았으므로.
말들은 죽은 새끼를 낳고 하인들은 새카맣게 질린 얼굴로 이유를 말하지 못하는 채 도망치고 성 곳곳의 등불이 이유 없이 꺼지고 가까운 곳의 우물에서 썩은 내가 날 때도 라파엘이 기꺼이 이 저주를 삼키고 먹어 치웠던 것은 동생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니, 미카엘이 남긴 유언과 유산을 그는 기쁘게 받기로 했다. 그는 형제를 죽인 배신자이자 유언장의 최초의 수신인이자 증인이자 집행자가 되어 성이 모두 무너지고 마지막 식량이 곪아 곤죽이 될 때까지 저주를 가꾸고 이곳을 사랑할 작정이었다.
그러니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배신자는 죽음뿐이라 하였건만 생존한 자신을 동생이 여전히 원망한다면, 부디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단단한 손끝이 그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창백한 양 뺨을 쓸어줄 수 있게 허락하기를, 또 그의 길고 가는 손가락에 입맞춤하고 다시 붙잡을 기회를 주기를.
눈을 감고 어둠 속에 앉아 그는 자신의 죽음이 라파엘 아나스타시아에게 끔찍한 저주가 되기를 바란다던 유언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기어코 유언장을 읽게 한 망자의 집착에 대해, 어릴 때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해, 놓을 수 없는 손에 대해, 가족에 대해. 끔찍한 그리움과 원망에 대해.
라파엘 아나스타시아는 죽은 남동생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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